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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moth
Created February 17, 20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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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Love&Poison』p.8)
The last night of the Phoenix Festival, Statford-upon-Avon, July, 1995.
Back at the cosy Shakespeare Hotel an orgy of Bacchanalian proportions ensued. An argument about the merits of otherwise of Pulp’s “Underwear” finally drove Brett and Mat from the festivities and at some point in the evening Charlie finally offered me a post at Suede HQ. I accepted with the caveat that under no circumstances did I wish to be involved in these so-called drugs of which Suede were so fond. When the concept of sleep dissolved in a fog of artificially induced enthusiasm for the lyrics of Jarvis Cocker, a trip to the local tavern prevailed. Several ales later we hastened back to our lodgings only to find a cordon of Her Majesty’s constabulary ringing the building. “Here, take this,” spake Charles, thrusting a curious miniature origami-style package into my sweating palms, before darting into the foyer. It was at this point that m’colleague turned a worryingly unnatural shade of grey. Charlie returned to aid and abet said colleague up the recently refurbished stairs. As a curious gagging and spluttering emanated from m’trusted colleague, the young bastard of an uppity Hitler - of hotel manager as officialdom would have it – became unnecessarily interested. “Shall I call a doctor?” he cuntingly enquired. “Not necessary,” responded Charlie, hurling the wreck of my accomplice into the nearest room. A moist re-enactment of a particularly colourful fireworks display erupted, accompanied by much slamming of doors and hollers of “We’ve just had this fucking place redecorated!” from the young Adolf. The next half an hour was spent paranoidly picking wraps and reefer butts from the room’s wastepaper baskets between vague fits of concern that my chum may have fatally overdosed on Suede-subsidised larger.
Finally, groggily, absolutely, I had arrived.
(원문:『Love&Poison』p.6~p.7)
This book would not have happened without the enthusiasm and encouragement of Brett Anderson, whose candid and revealing interviews form the backbone of this story. Mat Osman, Simon Gillbert, Richard Oakes and Alex Lee have all been similarly enlightening in providing their own individual perspectives and their frankness at times has been astonishing. Wonderful All Times. Extra special thanks must go to the former members of the band, Justine Frischmann, Mike Joyce and Neil Codling whose co-operation has gone well beyond anything I could have expected. Although Bernard Butler ultimately declined the opportunity to be give his side of the story, the meeting I had with hime to discuss his concerns is hugely appreciated. While never shying away from the madness and extremity of the whole affair, I hope I’ve shown some understanding of the behaviour of both sides. Offering their own illuminating insights, the key peripheral players, Peter Anderson, Alan Fisher, Jon Eydmann, Phill Savidge, Saul Galpern, Victor Aroldoss, Peter Sissons, Ricky Gervais and Tony Hoffer have been vital in untangling the web of rumour and intrigue. Equally essential on the fringes are Chris Mackay, Stewart Furini, Alison Hale, Malcolm Dunbar, Mike Smith, Sheri Friers Sam McCormick, Peter van der Velde, Ali Lush and Nathalie Fraser. For much appreciated advice and support above and below the call of duty, three hearty cheers to: Ben Lurie, Bennie Brongers, Jane Glover, Phyl Sprigg and Richard Kiernan at Interceptor, Lucia Burghi Gozalez, Jo Reilly, Jodie Banaszkiewicz, Ricky Coffey, Penny Humphreys, Kimble Garcia, Mike Gourlay, Janet Choudry, Erol Alkan, Lucy Madison, Matty Wall, Mike Christie, Vanessa Saunders, Claire Grainger, Nadine McBay, Lucy Cane, Fraser Thomson, Mat Everitt, Anissa Mangen, Alex Croft, Sam Cunningham, Jeremy Allen, Soraya Syed, Kas Syed, Jim and Aln, Michelle Kerry, Brychan Todd, Sarah McGiven, Jaci Spode, Simon Hobart, Peter Stewart, Robert Hayden, Hayden, Erin Dineen, Charlotta Waggert, Iona Ogilvie, John Brandham, Sarah Bee, Jose Contreras Ramis, Peter Crompton, Max and Jack, David Gejlemo, Claudia Pramono, John W. Lucey, Baxendale, Arse, Mar Galer, Charlie Myatt, Davis Wilkie, Goth, Jessica Appla, Martin Wallace, that bloke who mistook me for Alex James at Reading, David A Smith, the Mackays, Joanne Boyle and above all Anna Spivack, Andy, Kate, Oscar, Sam, mum and my two dads. There are undoubtedly legions of others I’ve missed out to whom I can only say buy enough copies of this book to ensure a revised edition. Special mention must go to Simon Price for invaluable help in the initial interviews and conception of this project. Similarly effusive thanks to my editors Ian Gittins and Mike Flynn, Miranda Filbee and all at Andre Deutsch. And Brobdingnagian gushes of gratitude to Charlie Chrlton for proving, as Gabriel pointed out, that dreams can indeed come true. It’s been a blast. Nam Myoho Renge Kyo. Everything Will Flow.
David Barnett, August 2003
Acknowledgements
Preface
Prologue : Introducing the Band
Where the Pigs Don't Fly
Just a Girl
Wonderful Sometimes
Moving
To the Birds
High Rising
The Big Time
This Hollywood Life
Have You Ever Been This Low?
So Young
Beautiful Ones
Starcrazy
Crackhead
Down
A New Morning
Attitude
The Next Life
초판 2003년 기준입니다.
모든 원본 글과 이미지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번역된 컨텐츠는 번역자와 원본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특히 검색이 잘 되는 블로그 등으로 내용을 퍼가시는 건 삼가해 주세요^^)
1. Where the Pigs Don't Fly (번역완료)
insatiable 2007.12.29 17:37 조회 수 : 6885 추천:1285
Sergeant Pepper 와 Summer of Love : 1967. 그해는 문화적혁명의 시간이였다. 음악이 변하고 있었고 약물과 더불어 attitude도 변하고있었다. 영국은 전년도의 자국의 월드컵우승을 축하하면서 즐기고있었다. 노동당이 재집권하게 되면서 산업을 다시 국유화하였고 낙태찬성안 (여성들에게는 해방으로 다른이들에겐 새로운 관용의 징후로 여겨졌던)을 통과시켰다. Joe Orton은 익살스러운 특이한 태도로 West End 관중들을 모욕하면서 기쁘게 만들었었는데 대담스런 그의 일화를 들어보자면, “요새 사람들 때때로 외도를 합니다. 그리고 꼭 반대의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할 필요도 없지요”. Joe의 남자친구는 Joe가 이룬 성공 모두를 질시했고 해머로 그를 죽도록 두들겼다. 이일은 꽤 부끄러운 사건이었는데 그는 Beatles의 모든 멤버들이 여자들과 함께 침대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포함하는 영화각본을 쓰고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The stones 와 함께 The Fab Four , The Kinks 그리고 그 외 그룹들은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음악을 만들면서 분주하게 보냈다. 브렛이 태어난 바로 그날 BBC Radio 1 은 첫방송을 시작했다 - Radio Caroline 같은 해적 팝 스테이션에 대한 BBC의 맞대응이었다.
그러나 모든 젊은이들에게는 앞선 세대가 남긴 많은 조각들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다.
사형제도는 계속 시행되었고 선거는 오직 21세 이상만이 가능했다. 그리고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tv는 여전히 흑백이었다. LSD는 약물의 선택사항에서 제외되었고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 간단한 쇼핑여행을 수학의 악몽으로 만들어버린 어리석고 낡은 통화제도를 상징. 그러나 이모든 것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린 것이 있었는데 핵으로 인한 파멸의 단면이었다. 쿠바의 미사일위협이 일어난 직후 영국은 첫 번째 폴라리스 잠수함을 만들게 되었다.
* Sergeant Pepper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년 발매된 비틀즈의 8번째 앨범을 지칭함.
* The Summer of Love - 1960년대 젊은이들에게 유행한 hippie movement을 대변하는 말.
* Joe Orton (1933-67) - 영국 레체스터 출신의 극작가, 블랙코미디로 유명했음.
* the West End - 영국 런던에 위치하는 메인스트림 전문 극장(theatre)을 통칭하는 단어.
* the fab four - 비틀즈의 다른이름
* the kinks - 1963년 결성된 영국록밴드, british invasion의 한축을 담당함.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 john lennon 작곡, 1967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에 수록.
베트남전쟁이 이미 공식적으로 2년을 넘었고 미국인의 참전이 늘어나면서 전세계적인 충돌이 이제 막 반환점을 돈것처럼 보였다. Brett Anderson은 바로 이런세상을 맞이했다. “ 나는 매우 겁많은 아이었다....무서운게 너무 많았다. 핵전쟁의 위협, 그리고 연무질중독 으로 죽어갔던 당신 부모들의 두려움. 악몽이었다.”
“우리 모두는 가난하지만 별을 바라보자” 아일랜드 여왕과 대중들이 선언했다. 브렛에게 특별한 곳이 Haywards Heath 라는 익명의 대도시 근교의 주택지대 라고 알려져있지만, 글쎄 알려진 것이 사실을 꼭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브렛은 사실 Henry ⅶ와 Charles Dickens 의 요양소 였으며, 수회 “Sussex에서 가장 잘 보존된 마을” 상을 수상한 Linfield라는 이웃마을 출신이었다. 이 큰 도시는 실제로 Linfield의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거주자들이 새 증기기관차에 의해 그들의 그림같은 멋진곳이 훼손되는걸 거부하면서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그 지역의 철도정류장은 몇마일 떨어진 황야에 건설되었고 철로 주위로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특성면에서가 아니라 규모면에서 Linfield를 추월하게 되었다. 브렛의 아버지 Peter Anderson씨는 Haywards Heath에서 나오라는 아들의 권유를 슬프게 받아들였다. “그곳은 끔찍한 곳이다. 그 역시 브렛의 알려진 이미지에 빠져있는건 아니다. ”브렛은 때때로 이런 런던스타일 억양을 쓴다. 그리고 꽤 딱딱하거나 조금은 상스런 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잘 교육받은 상냥한 녀석이다. 돌처럼 굳은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브렛의 엄마가 그를 꽤 자랑스러워 했을텐데...브렛도 자기 어머니가 그의 콘서트장에 오기를 바랬을 것이다. 내가 아는한 사실일 것이다“.
Anderson가는 원래 군출신의 가문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군에 계셨다. Royal Scat Fusiliers 소속이었다. 그는 실제로 드럼을 맡았는데 약간의 난봉꾼 기질이었던 예측하기 힘든 분이셨다. 때론 가족을 마구 때렸는데 결국엔 공원벤치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이런 가계도는 아이스크림 행상인에서 볼수있듯이 최소한 꽤 이상하게 묘사될 수 있는 Peter씨의 기호중을 일부를 설명해주지 않는가싶다. 그는 여전히 클래식음악의 광 팬이다.
“내가 어렸을때 나의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억은 그가 매주 다른일을 했다는 것이다,”(브렛 says). 그는 요리사훈련을 받았는데 내가 태어나기전 몇주동안 요리사로 일하셨다. 요리사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있지 않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팔았고 택시기사가 되기 전에는 유리창닦이도 하셨다. 그러나 그가 가진 가장 황당스러웠던 직업은 우리 학교가 매주 화요일 이용해야했던 지역풀장(pool)의 수영장 관리인이었다.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일해본적은 없었다. 하여튼 이러한 일들은 생활비를 모으느냐하는 문제로 볼수있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한가정의 아버지가 되는 것을 인생에서의 성공으로 고려하신 것 같았다." Peter Anderson씨는 오늘날까지도 택시기사로 일하고있는데 그의 택시는 Suede를 기념할만한 물건들로 치창되어있다.
* Charles Dickens(1812~70) - 빅토리아 시대 가장위대한 영문소설가
브렛의 어머니인 Sandra Farrow 도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비슷하게 자랐다. 재능있는 화가였던 그녀는 Gustave Klimt와 멕시칸 화가인 Frida Kahlo의 팬이었다. Frida의 비극적인 스토리는 젊은 Brett에게 오래지속될 감명을 주었다. 여섯 살의 나이로 척수성소아마비에 걸린 프리다칼로는 십대때 큰 버스사고를 당했다. 차에 튕겨나간후 그녀는 자궁속까지 파고들어간 철막대에 관통상을 입었다. 살아났지만 아이를 가질수 없었고 후에 유랑하는 Leon Trotsky와 불같은 연애를 시작했지만 그녀의 남편에 의해 자주 폭행을 당했다. 그녀의 그림은 그런 그녀의 고통스런 삶을 반영하고있고 특히 그녀의 수많은 초상화에서 한여자의 몸속에 갖힌 남자의 인상과 크게 과장시켜 표현된 그녀의 눈썹과 수염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는 많은 Suede의 가사에 투영되었다.
“나의 가족들은 매우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다,”(브렛 remembers) 어머니는 옷을 만들기도 했는데 한번은 근사한 여인들이 와서는 옷이 셈나서 빼앗아가기도 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가치를 많이 인식하지는 못하셨다. DIY류의 집..Sussex출신의 한 아이에게는 쉽지않은 상투적인 줄거리 아닌가. 광산아래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꽤 가난했다. 우리 가족은 실제로 수프를 만들 버섯을 캐러 들판에 가기도했다. 정말 주위에 돈이 없었다. 나의 가족은 항상 돈걱정을 했다. 그런 배경이 아마도 내 인생에 어떤일이 일어나게할 많은 원동력을 준듯하다. 잠재의식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로하여금 상당한 야망을 품게 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그녀가 단지 누구인지 보여줌으로써 나에게 예술가적인 감수성을 심어주셨다. 추측하건데 음악과 그림을 사랑함으로써 말이다.“
브렛과 함께 가장길게 일해온 협력자 Mat Osman이 말했다. 브렛의 어머니는 아주 자연스런 예술가였다. 대상을 스케치하고 색을 칠할 때 그녀는 그것에서 이상한 점을 보려하지않았다. 우리는 그런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출신이다. 여러분들은 화가와 팝스타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방과 물건을 장식하고 스케치했던 가족을 우연이라도 만나본 적이없었다.
* Gustave Klimt(1862~1918) - 오스트리아태생 상징주의화가.비엔나예술 계승운동의 멤버
* Frida Kahlo(1907~54) - 큰 국제적명성을 얻었던 멕시코태생, 리얼리즘,심벌리즘 화가
앤더슨가는 거대한 보기흉하게 뻗어나간 쓰레기장이 되어 쓰레기 매립장을 가진 작은 숲 옆에 위치한 Linfield에 있는 유일한 공영주택의 맨끝부분에서 살았다. “빅토리아 풍의 집 같았다.(brett recalls) ” 나의 아버지는 Hector Berlioz 의 음악이 층 아래로 울려퍼지게했고 벽에는 Aubrey Beardsley 의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Peter가 가장 사랑했던 작곡가는 Franz liszt 였는데 그는 화려한 헝가리 출신의 피아노 거장이자 낭만주의자 였다. 국제적인 플레이보이중 최고였던 Liszt는 19세기의 팝스타였으며 그의 삶에서의 사랑은 음악만큼이나 열정적이었다. 그는 전유럽에 걸쳐 그에의해 실연의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긴행렬을 남겨두었는데 Princess Carolyne von sayn wittgenstein 과 Countess Marie d'Agoult 까지고 포함했다. 그후 그는 성직자가 되기위해 상류사회의 삶을 포기하게된다. Peter는 Liszt가 태어났던곳을 몇차례 순례하였는데 기념품으로 몇줌의 흑을 가지고 돌아온적도있었다. Anderson가족이 1963년 그들의 첫아이를 가졌을때 Peter씨는 Liszt의 딸인 Blandine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아버지에 의해 이름지어진데 반해 다행이 난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셨다.”라고 브렛이 웃음지었다.
앤더슨가의 두 번째 아이(사내 아이였다)가 Peter씨의 또다른 위대한 영웅인 Viscount Horatio Nelson이 태어난날인 1967년 9월 29일에 이아이가 태어났을때는 뭔가 신의 개재(중재)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런 불가사의한 우연을 기리기위해 Peter씨는 매년 그들의 정원에 국기를 걸자고 주장하곤했다. Peter씨는 여전히 이일을 하고 있다. “ 그때 아이였던 나에게는 황당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태것 가장 위대한 일들중의 하나일듯싶다”.
Brett은 그의 이름이 티브이쇼 인 The Persuaders에서 Roger Moore의 역할을 맡은 Lord Brett Sinclair의 이름을 따른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어머니가 말하신거다. Roger Moore는 이런 신사 스타일의 사립탐정들중 하나였다. 나는 이런점을 항상 좋게 생각했다.”
Mat Osman 은 앤더슨가족이 그 지역의 공동체와 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기억한다. “Haywards Heath는 꽤 부자동네에 속하지만 Brett은 내가 알기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은 정말 괴상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고 같은양의 돈을 벌고 같은일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당신이 브렛의 집에 놀러왔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고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거실에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화살을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범했고 정말로 가난했다. 내가 알기로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Brett은 그녀의 손윗누나를 잘 따랐는데 지금 세라믹 공예가인 그녀는 브렛이 음악과 평생의 연애를 하도록 인도했던 장본인 이었다. “나는 정말 누나를 존경했다. Blandine은 항상 나에게 좋은 누나였다. 나를 위해서 David Bowie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나의 생일선물로 Beatles의 앨범들을 사주었다. 15살이 되던해 그녀가 집을 떠났을때 누이는 그녀의 모든 레코드들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누이는 아주 똑똑하고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며 물건에 사심이없고 솔직하며 화려한 삶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Devon에 있는 언덕위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녀가 Sweet & Elton Jhon으로 분장한 나를 본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이 엘튼존의 안경을 쓰고 Crocodile Rock을 연주하는척하는 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있다.
* Hector Berlioz (1803~69) - 프랑스태생, 낭만주의 작곡가 ,symphonie fantastique 로 유명함.
* Aubrey Beardsley (1872~98) - 영국 brighton 출신,에로틱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유명한 화가이자 소설가.
* Franz liszt (1811~86) - 헝가리출신,19세기 로맨틱시대의 거장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 Viscount Horatio Nelson (1758~1805) - 나폴레옹시대의 트라팔카 전쟁으로 유명한 영국해군 제독
* The Persuaders - ITC에의해 만들어진 1971년 TV 범죄시리즈물, Danny Wilde와 Lord Brett Sinclair 라는 두 플레이보이의 활약상을 그림.
아주 어린 나이에 Brett은 자신이 음악적으로 모방하는 것보다는 만드는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부모님의 침대에 누워 콧노래를 부르면서 “아! 나도 멜로디를 만들수있구나” 했던 어린시절의 생생한 기억이있다. 기억으로는 이일이 나 이외의 사람들만이 할수있는 것 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라고 갑자기 알게된 것 같다.
이를 기점으로 그의 유일한 야망은 뮤지션이 되는것이었다. “나중에 자라서 뭘하고 싶니?”라고 사람들이 물어왔을때 “그런 질문은 진부해서 대답하기 싫은데요”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뮤지션은 항상 내가 하리라고 결심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역시 Blandine의 도움으로 Brett은 처음 기타를 잡게된다. “그녀는 예술대학에 재학중이었고 나는 약 13세가 되던해에 누이를 만나러갔다. 누이는 어쿠스틱기타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집어서 Bob Dylan의 노래들과 아주 간단한 싱어송라이터의 곡들 ‘Leaving on a jet plane', 'Kumbaya' 같은 아주 간단한 코드의 곡들을 연주했다. 정말 쉬웠다.”
Brett은 머지않은 후에 40파운드로 적색 Westone 기타 한대를 구입했는데 그의 첫 번째 전자기타였다. “그는 항상 기타로 노래부르고 친구들과 작은 노래를 몇곡 만들기도 했는데 그들은 커버곡들도 연주했다”(Peter says). Brett은 비틀즈의 노래와 Morrissey에 열중했는데 Smiths도 좋아했다. David Bowie, Elton John의 초기곡, Billy Joel, Sex pistols 등도 좋아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느날 브렛이 학교에 가서 가지고있는 것들을 그앨범들로 바꾸곤했는데 집으로 가져온 Sex Pistols의 앨범들을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
Sex pistols와 punk rock은 젊은 Brett에게 대체로 큰 영향을 준듯했다. 그는 무정부평화주의자로 구성된 펑크집단인 “Crass"에 열중했다. 그가 입었던 재킷의 등에 새겨진 ”Nagasaki Nightmare“는 그단체의 노래 제목들중 하나였는데 이는 80년대의 특유의 핵 편집병(증)에 대한 답례였고 그것은 후에 Suede의 가사에 종종 나타나곤했던 테마가 되었다.
“나는 겉으로는 펑커였다. 왜냐하면 그당시에는 여러분들도 갱집단에 있어야했다”.(Brett says). "펑커들과 ska-boys, head-bangers 가있었다. 나에게는 펑커였던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하루는 나의 집에와서 “난 하여튼 헤드벵어가 될거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후 그는 나에게 그의 펑크앨범들을 팔아서 데님재킷을 구입했다. 그리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추측컨대 지나치게 클래식음악의 팬인 나의 아버지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나는 클래식음악의 호화스러움을 싫어했다“.
그러나 이런 순종치않은 성향에도 불구하고 Brett은 학교에 다니는동안은 열심히 공부해서 빛나는 성적표를 받았고 결국 최고가 되었다. 큰 험한 세상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그가 일곱 살이 되던해 작성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던 학교 essay에 잘 표현되었었는데 당황스럽게도 나중에 그 에세이가 지방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Linfield에 살고 있다. Linfield에서 사는게 좋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많은 나무들과 넓은 들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Linfield보다는 버려진 빈민가가 있는 큰 도시에 건물을 세웠으면 한다. 그곳은 다시 개발될 것이다. 또 Linfield가 좋은 큰 이유가 하나있는데 많은 농장들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들판에 염소들도있다. 감옥에 가야할 사람들이 있는데 나무를 베어가고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일은 모두 10대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데 그들자신들이 꽤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러는가 싶다. 자동차들만 Linfield로 진입했으면 한다. 화물트럭은 사양이다. 그것들은 너무크고 연기를 배출하고 악취를 풍기며 큰 소음을 내기 때문에 Linfield를 흉하게 만들고 있다. 톨게이트도 다시 지어졌으면 좋겠다.
숲에있는 모든 쓰레기가 치워지고 숲에 다시 버려지지 않았으면한다. 사람들이 숲에있는 나무들을 잘라서 넘어뜨리고 있는데 그것도 중단되었으면 좋겠다“.
brett과 blandine 둘은 Linfield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전부터 부모에의해 읽고 쓰는법을 배웠다. “실제로 학교를 좋아했다.”(brett admits). " 좋아했던 두가지가 있었는데 재료와 스포츠였다. 정말 좋아했다. 나는 꽤 학구적이었고 과학에도 소질이있었다. 만약에 영리한 아이가 있다면 그들은 물리학과 수학을 배우도록 했는데 그런 것을 즐겼다.“
“아홉살쯤 미스 Holden의 반으로 옮겼을때 초등학교때의 브렛이 맨처음 떠오른다”.(Alison Hale recalls). Suede팬인 그녀는 함께 학교를 다녔던 Brett Anderson이 그녀가 가장좋아하는 팝스타중의 한명이 되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한반에서 2년을 보냈는데 내가 3학년이었을때 브렛은 열 살먹은 4학년이었다. 미스 Holden은 학교에서 가장 심술굳고 사나우며 미움받는 선생님이었다. 난 그녀의 수업을 받을때면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Brett과 그의친구 Barry Davis는 그녀가 좋아했던 학생들이었는데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밖의 모든 학생들에게 무서운 존재였지만 그녀는 Brett을 그녀의 ”작은수학자“로 부르면서 칠판위의 문제를 풀도록 시키곤했다. 나는 Brett이 언제 록스타가 되었는지 몰랐다. 나의 친구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세상에 Brett Anderson이 Suede의 싱어야!“ 내 친구는 ”알아 Mat Osman은 베이스를 치지!“ 라고 말했다. 나와 친구들은 Brett이 로켓과학자나 그 외의 사람이 될꺼라고 생각했었다”.
Brett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일종의 손목이 축처진 꽃을 가꾸는 멋쟁이지만 그는 실제로 유명한 스포츠맨이었는데 Haywards Heath, Oathall Secondary 소속의 학교 풋볼팀에서 주장을 맡았으며 Sussex County를 대표해서 몇 개임을 치루기도 했다. ‘브렛은 크로스컨트리러닝과 풋볼에 매우 소질이있었다.“ Peter Anderson이 환하게 미소짓는다.
“그가 Oathall에 있었을때 브렛은 신문배달일을 하기도 했었는데 항상 신문배달하기 한시간전에 일어나서 마을 블록주위를 계속뛰어 다니곤했다. 브렛이 Oathall의 크로스컨트리 팀의 일원으로 선택되었을때 다른 학교들과의 시합에 참여하곤했다. 그는 거의 항상 1등이었다. 언덕을 제일 먼저 오르는 그를 볼때 정말 좋았다. 그러나 브렛은 이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지독한 복통을 자주 앓았기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때 Brett에게 좀더 신경 쓸걸” 앨리슨이 한숨을 쉰다. 브렛이 뒷주머니에 머리빚을 넣어가지고 멋을부리던 것이 기억난다. 항상 머리를 가볍게 손질했다. 그의 머리는 David Bowie처럼 빛났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과 똑같은 휘날리는 앞머리였다. 우리는 브렛이 젠체하는 사람이었다고 항상 생각했었다. 우리는 브렛을 따라다녔는데 나의 친구가 브렛의 친구인 Simon Cambers를 마음에 두고있었기 때문이었다.
* Oathall - 서부 sussex의 중심에서 haywards heath 와 linfield 사이에 위치한 지역,
Oathall에서 브렛이 지낸 마지막날들 중에 Brett의 옷에대한 code는 작은 도시의 소년치고는 조금 괴짜 이상의것 이었다. 확실히 Bowie의 “Let's dance look"에 영향을 받았음이 명백해보였는데 카나리아색 수트로 옷의코드를 마무리지었다. ”브렛은 머리를 염색하고 노란색정장을 입곤했는데 소위 Bowie풍의 패션이었다.“ (Pter Anderson admits). 그러나 브렛은 단지 그당시 그가 존경했던 팝스타들의 모습을 본뜰려고 했을뿐이었다. Brett은 꽤 근사해 보였고 최고였다.”
모든 이가 호의적이진 않았고 특히 Bentswood Road의 Bentswood Boot Boys같은 Haywards Heath 갱들은 더 그러했다. Bentswood Road에서 Oathall로 가는길에 브렛은 특히 침착하게 주위를살피며 다녔는데, "의심할여지없이 그 지역 녀석들은 Brett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Alison Hale says)
"그지역에서 성장하는 내내 나에게는 폭력이라는 큰 하층류가 존재했다.“(Brett agrees)."그들은 나를 동성애자라고 불렀다. 나는 꽤 이런 상황을 좋아했다. 실제로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모욕당할 때 한마디의 완벽한 욕을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엔 이런일이 모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실제로 폭력에관련된 일이 있었다. 기억나는 하나는 한번은 철근으로된 봉을가진 나이든녀석들이 한 소년을 들어올려서 그소년의 가랑이사이로 봉을 넣어서 봉을 구부린사건이 있었다. 그는 철조각들을 빼내기 위해서 병원에 가야했다. 나는 이런 일들을 피해나갔는데 스포츠에 익숙했던게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Brett은 후에 “ Bentswood Boys"에서 이런 십대의 시절을 노래했는데 이 노래는 또한 그의 첫 번째 여자친구였던 Tina Harvey를 상기시킨다. 그녀는 Bentswood Road에서 살았는데 불가피하게도 일찍 헤어지고 말았다.
브렛이 15살이 되던해 그는 그의첫번째 성(sexual)과의 조우를 즐겼고 감당해냈다. “그일은 약간 실망스러웠다.”(Brett admits). 그리고 꽤 지루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은 sex를 즐기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경쟁의 대상이며 당신이 처리할 수 있는 어떠한 것으로 변하게 만들어야할 그런 종류중의 하나이다. 비유하자면 올리브라 할까..당신이 처음으로 올리브를 손에 쥐었을때 “이게 뭐지? 괴상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다가 지금와서는 “난 올리브가 좋아. 내 입에서 떼어내질 못하겠어.” 이런 상황일 것이다.
Peter Anderson씨는 그의 아들을 Ladiesman(여자에게 호감사려는 남자)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 두명 있었던 것 같다. Alex라 불리웠던 여자가 있었는데 집에 놀러와서는 브렛의 친구중 한명이었던 Simon과 나갔다. 그친구는 몇몇를 제외하고 브렛과 관계가있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단지 친구였던 시기 이전에 만난 그의 첫 번째 정식여자친구라 할수있겠다. Justine이 한번은 왔었는데 꽤 매력적인 친구였다. 그러나 그 친구를 몇 번 봤었을 뿐이었고 나중에 그둘은 헤어졌다.
* Let's dance - david bowie 가 1983년 발표한 앨범의 동명 hit싱글.
성적인 일과는 별개로 Haywards Heath는 지하선술집에가는 그런 세대들을 위한 여흥거리를 전혀 제공해주지 못했다. Brett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여흥거리를 만들어야했다. “나와 Simon Cambers는 Bob Dylan의 노래를 부르거나 Haywards Heath High Street에서 영화 Dirty Harry의 즉흥scene을 연기하는등등 좀 어리석은 짓들을 많이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통행인을 상대로 재주를 보였는데 문자그대로 엉성하게 밥딜런의 노래들을 불렀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가서 다시 이런장면들을 보고 싶다. 한 행인이 우릴보며 웃으며 지나갈 때 우린 이런상황을 자랑스러워하곤 했는데 솔직하자면 길거리에서 코믹하게 유명인을 모방하는것이었다.
Yamaha GT 50 이라는 오토바이를 구입했을때 브렛은 더많은 스릴을 즐기게 되었는데 그가 화장실 청소와 여러 가지 지루한 사무일들을 해가며(그외의 그가 한일은 그의 기억속에서 지워져 버렸다)번돈으로 구입한 바이크였다. “Mr T 마스크를 쓴 나의친구와 Spide man 마스크를 쓴 나는 Haywards Heath주위를 돌아다녔다. 한때 우연히 우리는 사람들이 우릴발견하고는 거의 우리와 부딪힐 정도로 운전한적도 있었다.”
Peter Anderson씨는 그당시 브렛이 오토바이를 타면서 한 익살맞은 짓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와같은 일들은 약1년 넘게 지속되었는데 하루는 그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한후 ”이제 이일도 지겨워!“ 하고 말했는데 얼마나 우린 기뻐했었던지..이일이 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운전이라는 모험이었다. 난 브렛이 지금까지도 운전을 배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있다고 믿고 있다.”
브렛과 그의 친구들에있어 그 해 가장 최고의 순간은 magic mushroom의 경험이었다. “문자그대로 우리는 시간날 때 마다 mushroom tea를 만들고 취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난 이와같은 일을 계속했었는데 Haywards Heath는 안전한 곳이어서 우리는 드러내놓고 LSD를 복용하면서 거리를 활보할수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환각제에 취해서 우리가 어디있는지고 모른채 그 주위를 지나가는 월급쟁이들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런 상황에 영감을 얻어서 만든곡이 “Where the pigs don't fly 였다. 사람들은 dope 와 mushroom을 종종 했는데 때때로 acid(LSD)를 하곤했다. 우리는 심지어 그때 coke가 뭔지도 몰랐고 speed도 마찬가지였다.
브렛의 부모님은 행복하게도 아들의 그러한 과외활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브렛은 전형적인 학생으로 보였다. “Brett은 꽤 예리했고 우리를 절대 곤경에 처하게 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분도 자식이 있다면 그가 밖에서 무얼했는지 항상 알수는 없는 노릇이다.후에 브렛이 환각제를 가지러 나간 것이 내가 본 유일한 사건이었다. 난 Brett이 마리화나를 피우는장면을 잘 눈치채지 못한다. 이런일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단지 그런종류의 것들이 합법화되길 원하는것같다. 자! 물론 우리는 이것에대해 다른 의견을 가질 것이다.”
* magic mushroom - 환각제
* mushroom tea - psychedelic mushrooms으로 만들어진 마약혼합물. 멕시코산 버섯에서 채취되는 환각제의 원료가되는 행동성분(=psilocybin)
* dope - 마약
* coke - 코카인
* acid - LSD(준합성 환각제=Lysergic acid diethylamide)
* speed - 필로폰/암페타민
비교적 건전했던 sex와 drug에 대한 관심외에 브렛이 가장 열망한 대상은 록큰롤이었다.브렛은 그의 삼촌으로부터 기타레슨을 받았었는데 삼촌은 “Deputies" 라는 밴드에서 세미프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들은 50년대의 음악을 했던 ”Joe Brown & the Brothers" 와 비슷한 버전이었다. 삼촌은 집에 슬쩍 들러서 매주 한번정도 기타레슨을 해주었는데 나는 그에게 5파운드 지폐를 답례로 주었다.“(Brett says) 가수가 아닌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초점을 맞춘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노닥거리며 보냈다. Mat을 만나기전에 나는 소위 밴드도 가졌었다.
이런 초기 모험들은 “Suave & Elegant"(초기 suede가 밴드명을 찾고있었을때 다시 떠올랐던단어)와 the Pigs를 포함했다. the Pigs 라는 이름은 그것의 테마송인 ” We are the pigs“에서 이 이름의 유명세를 알수있었고 후에 앨범 Dog Man Star 의 리드싱글이 되었다.
“내가 소위 밴드를 언급할때는 기타 한대를 가지고 한방에 있는 두사람을 의미한다.”(Brett admits) 나와 나의친구 Simon Holbrook 은 종종 함께했었는데 우리는 이 히피(hippy)밴드를 만들어서 “String the years together like beads" 와 같은 제목을가진 노래를 만들었었고 이중에는 ”Homage to the beatles" 라는 곡도 있었다. 후반부의 코러스는 다음과 같다.
“Homage to the Beatles, homage to those guys
Homage to the Beatles and paul McCartney's eyes."
“지금 들으면 이노래는 유쾌하게 들린다. 하지만 꽤 진지한 노래였다.“
브렛의 첫 번째 음악의 조언자는 Oathall 출신의 Simon Cambers 라는 또다른 친구였다.“그는 수많은 밴드에서 드럼을 쳤고 Saudi Arabia에서도 연주를 했다. 그는 꽤 좋은 뮤지션이다.”(brett says) 그러나 브렛은 1984년 여름 Haywards Heath Sixth Form College 로 옮긴 후에야 비로소 그의 가장오래 지속된 음악적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6피트 이상의키에 긴 블랙코트, 긴머릿결 그리고 유별난 프로필을 가졌던 Mathew David Osman은 Peter Anderson씨에게는 바로 Franz Liszt의 살아있는 환생으로 보였다. 앤더슨가의 거실에는 이 Suede의 베이스주자와 실제로 불가사의하게 닮은 Liszt의 큰 초상화가 있다.
“그 당시 Mat은 전에 Goth 밴드의 일원이었던것처럼 보였다(Peter recalls). 그리고 그가 브렛과의 첫 대면에서 한 말은 ”Do you wanna join a band?" 였고 이 상황이 그들이 함께 하게된 과정이었다.“
“난 브렛을 이미 알고있었다. 그는 꽤 유명했다.”(Matt recalls). “작은 도시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날까. 가장 비정상적인 사람이 꽤 유명한 인사가 될 수있다. 브렛은 노란색타이에 타이핀을 한 젊은 주식브로커 역할을 한 Tommy Steel처럼 옷차림을 했다. 자신 이외의 사람들과 정확히 닮지않은 Haywards Heath에사는 사람이라면 두개의 머리를 가지는 편이 낫다.”
* Joe Brown(1941~) - 유명한 영국출신 기타리스트이자 연예인
1967년 10월 9일 Welwyn Garden City에서 태어난 Mat은 기차로 런던에서 약 1시간 거리인, 대다수가 살고있는 Home Counties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 Brenda는 임시교사 였고,그의 아버지는 Dunlop 과 American Express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회사원이었는데 Mat이 열 살이 되던해 돌아가셨다. mat의 부모님 둘다 음악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는 Showaddy Waddy 같은 이상한 되물림되는 레코드들의 모음집을 듣고 성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처음 좋아했던 밴드는 Abba였다. 그는 대학교에서 Beatles 노래들을 부르고있었던 Brett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 당시에는 Beatles를 꽤 싫어했다. 1974년 이전의 음악의 역사에 대해 몰랐었다. 그는 Beatles의 노래들을 불렀는데, 난 그 이유를 모르겠다. 브렛이 그렇게하기로 한 것은 어떤 의미면에서는 정상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내가 브렛에게 처음건낸 말은 ”Do you wanna join a band?" 였는데 그는 어리석지 않았던 기타리스트여서 한말 이었다. 브렛은 내가 아는 성격이 쿨하고 악기를 다룰수 있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Sixth Form College에 오기전에 Mat은 Cuckfield 근처의 Warden Park College를 다녔다.
“브렛의 학교보다 조금 나은 버전이라고 보면된다.”(Mat says). 그 두학교는 자주 대규모의 조직화된 패싸움에 휘말렸다. “모든 갱문화는 세부적인것에 관한 것이다.”(Mat says)." 캐주얼(옷)의 규모가 커져 그들과 관계된 디자이너들이 매주 바뀌곤해서 Fred Perry 가 아닌 Pringle 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할수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드(mod)족 이었던 이유는 스쿨유니폼이 모드족풍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교의 모드족들은 파카 나 그외의 옷을 걸치지 않았다. 단지 타이끝을 안으로 쑥 집어넣었을 뿐이었다.“
브렛처럼 Mat도 기억할수있는한 음악에 심취해있었다. 기타리스트가 되려는 원래의 그의 소망은 보기흉한 그의 키 때문에 망가졌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기타를 가지고 있었고 나도 시험삼아 해보았지만 그 기타는 내가 손에 쥘 경우 Ukulele처럼 보였다.” (Mat laughs). “그래서 나는 Impact Music으로 달려가 bass 한대를 구입했다. 89파운드 였는데 그 당시에는 꽤 고가였다. 실제로 여러분이 베이스를 치려하는 이유는 밴드에 소속되길 원해서일 것이다. 나는 항상 밴드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 나에게 그건 인간존재의 면에서보면 최고의 이상(영역)처럼 보였다.”
* Showaddywaddy - 영국 레체스터 출신의 70년대 8인조 팝그룹, 50년대 노래들을 리메이크해서 인기얻음.
* Fred Perry(1909~55) - 영국출신,전영테니스오픈 3회우승자,Fred Perry polo shirt로 유명함.
* Pringle - Pringle of Scotland, Robert Pringle가 만든 고급 의류브랜드.
* Ukulele - 기타 비슷한 4현악기
Brett 과 Mat이 첫 번째로 시도한 모험은 “Paint it black" (간략하게 지금은 Stewart Furini 라고 불리우는 Mat의 친구중 한명인 Stewart Avery를 포함했던)이었다. ”밴드시작의 첫해 Mat은 나에게 amp와 일렉트릭 기타를 빌려주었는데 나는 능숙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다.“(Stewart remembers).
Stewart와 Mat은 그들에게 주어진 학교 프로젝트로부터 도망친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가는 것이 신경쓰이진 않았다. 대신 우린 Mat의 집에가서 아침내내 기타와 베이스를 쳤다. Mat이 가지고있던 오래된 tape echo unit(사용하는데 애먹은)도 마음속에서 잊을수가 없다.
그 둘은 활기차게 음악하려는 의도로 보드카 한병을 구입했는데 전형적인 틴에이져의 모습그대로 Stewart는 앓아 누웠다. “ Mat이 나를 돌보려고 자신의 집에 와야했고 나는 그날밤 거기서 지내야했다. Mat을 만나기전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Mat으로부터 Lou Reed와 Talking Heads 의 음악을 알게되었고 다음 5년간은 오직 이들 음악만을 들었다.
Mat은 그후 Brett에게 Stewart를 소개시켜 주며 같이 밴드를 할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Stewart는 바로 Brett의 이단아적인 외모에 흠짓 놀랐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항상 스타일리쉬했고 확실히 입는것에 관심을 두는듯했다.”(Stewart remembers). "나는 초라한 grunge스타일의 옷을 입었는데 나는 정말로 Brett과는 어쨌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Haywards Heath 지역에서 음악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라서 mat과 Brett은 - 그들은 그당시 음악의 거장은 아니었다 - Stewart로 하여금 이 신출내기 밴드에 들어오도록 권유했다. “나는 확실히 이 밴드의 일원이 되려고 하는 참이었다.”(he admits). 교습을 시작했을때 나는 많은 믿음을 가질수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아마 두세번의 리허설끝에 가서는 난 밴드에서 가장 형편없는 기타리스트가 되어버렸다.“
Paint it Black 은 Linfield에 있는 브렛의 방에서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주를 했다. 브렛의 방은 Pink Floyd의 The Wall의 벽화로 장식되어있었다. “나는 브렛의 침대에 앉아서 빌린 기타를 연주했다.(Stewart says). 청중으로는 여러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거기엔 좀 잰체하는 허식가 스타일의 노래를 좀 많이 불렀던 Gareth란 친구도 있었다. ”How does it feel to have a rich father, red make of car...baby I don't care".라는 코러스를 가진 한 노래가 희미하게 기억나는데 브렛이 불렀고 그가 쓴곡이었다.“ Stewart는 그 밴드가 자기곡외에도 ” Venus in Furs" 나 “Heroin" 도 연주했던걸로 기억한다.
* Lou Reed - 뉴욕 브룩클린 태생, Velvet underground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 Talking Heads - 1974년 결성된 뉴욕출신의 펑크록 뉴웨이브밴드
* Venus in Furs -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부른 노래
“Brett은 실제로 학생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내가 했었던 대학 매거진의 편집장일을 인계 받았다.”(Stewart reveals). 우리가 몸담았던 그해는 매거진의 이름이 다양했었다 ; Close to the Kremlin, Close to the heart, Close to the bone, 또 그밖의 많은 이름들. 생각하건데 실제로 브렛이 그 매거진의 마지막호의 편집인 이었다.“
그 매거진은 “Farewell to the class of 86" 이라는 의문속의 특집을 포함했다. 브렛의 이름은 ” Valentino" Anderson : 이라는 닉네임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Brett에게는 쓰디쓴 해였다. 상도 날라가버리고..그 자신의 매거진 속 연재만화에서 죽지 않고 계속 등장했으며 모든 호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화장실의 휴지처럼 필요했지만 수동적인 기고가 였다. 좋은점:유머스럽고 관대하다. 나쁜점:약속을 많이 하지만 이행은 의문스럽다. Brett은 Jackie 잡지의 커버모델로 떼돈을 벌거나 헤어살롱을 개업하는걸 고려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매거진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소문을 듣고 그들중 두명이 누군지 알게되기 전까지 그들은 1년이상은 아마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Stewart says). 나는 정말 그들에게 감사했다. Brett을 실제로 많이 알진 못했지만 Mat은 정말 좋은 친구였고 음악으로 성공하겠다는 인상(그가 정말로 원했던)을 항상 나에게 심어주었다.”
86년도 Haywards Heath Class는 7월 19일 “Grunge Aid"라는 학기말 연극소품을 무대에 올렸다. "Brett과 Simon Cambers 그일단의 무리들이 행한 Monty Python 이라는 소품을 확실히 기억한다.”(Alison Hale remembers). 그들은 검은색 스트라이프정장을 입고 모두 의자에 앉았다. 꽤 유명한 소품이었는데 ‘When I was a lad,,.'라는..여러분들도 알 것이다. 다른사람이 한것보다 꽤 전문적이었고 더 정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Monty Python이 포함했던 일부 진부하고 어리석은 부분들을 기억한다.”(Brett admits). 차라리 잊어야했을 일들을 해버렸다.“
학기가 끝나고 Stewart가 이탈한후, Paint it Black은 Geoff 라고하는 새로운 집합체로 진화했는데 Geoff는 진짜 밴드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한 Brett과 Mat의 Pre-Suede 시도들중 유일한 것이었다. Gareth Perry가 프론트맨의 역할을, Brett은 기타와 백킹보컬을 맡았다. Mat이 베이스를 맡고 Danny Wilder라는 이름의 드러머가 보충되었다. “ Danny가 우리와 진짜로 연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Mat says). "그는 단지 물건을 치는 것에 익숙했다.“
Alison Hale은 Danny가 브렛의무리들과 연을 맺을무렵에 Pilgrim이라고 불렸던 한 지방 pub에서 다른 밴드와 연주했었던 것을 기억한다.“그때 나는 그친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적색심장이 그려진 하얀색 boxer용 운동팬츠외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있었다.”
Gareth는 지방에서 인기있던 사람 그이상 이었다.“그는 Haywards Heath..의 멋진 미인 이라고 해야하나”브렛이 방긋 웃는다. “그 자신이 George Michael 과 Cid Vicious 의 중간체라고 생각했던 지방의 유명인사였다. 그는 정말로 좋은 목소리를 지녔고 일부 좋은 노래들도 가지고 있었지만 Gareth는 나와 mat이 다녔던 학교출신이 아니었다. 단지 우리 모두가 음악을 좋아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 Monty Python - 6명으로 구성,Monty Python‘s flying circus를 만든사람들의 집합적인 이름,1969년 BBC에서 처음 방송된 영국TV코메디 소품쇼, 4편의 시리즈에 걸쳐 45편의 에피소드가 방송됨.
이 가수의 유명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형의 남자 모델로서의 성공에 분명히 영향을 받은듯했다. - 아기를 안고있는 80년대의 “New Man"으로서 고전 Athena여신의 포스터에 등장했던 (후에 ” You are not my dad!" 라고 말하고있는 아기로 유쾌하게 패러디되었던)
“Gareth의 큰형 Adam은 믿을수없이 매력적이었다.”(Mat confirms). “한번은 Daily Mail에 그해관한 이런 기사가 실린적이 있었다 - ”나는 1,000명의 여자들과 자본적이 있다.“ 그는 수많은 레코드들과 내가 몰랐던 많은것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Kraftwerk 이나 Simple Minds 등등..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레코드들을 발견하는 일을 경험했다. 난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음악적으로 속물이었다.”
Brett이 이 고백을 듣고는 웃는다. “난 정말로 Lloyd Cole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Velvet Underground 음악에대한 완전한 강탈이라고 맷이 말했다.“
“대부분의 레코드들은 음악매체를 통해서 발견했다.”(Mat continues).“그때는 Mojo culture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음악을 내가 발견하게 되었을때에는 마치 내가 고고학자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Brett과 Mat이 얼터너티브음악에 점점더 흥미를 가지게된 반면에 Gareth의 음악에 대한 기호는 더 보수쪽으로 기울게되었다.“나와 Brett은 Housemartins 와 Smiths 그리고 비틀거리는 C86같은 부류의 분위기에 점점더 빠져들었고 Gareth는 좀더 주류의 음악을 하길원했다.(Brett confirms)
음악적인 분담의 결과로 Brett은 음악과 더불어 가사를 가진 노래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그일이 일종의 전환점으로 보였다.”(Brett says).“때때로 나는 노래를 써서 밴드에게 가져가서는 ”이 노래 어때?“ 라고 물어보곤했다. 그 노래들은 꽤 파생적이었으며 비틀즈에게서 영감을 얻은 곡들이었다. 다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 Red Ferrari 나 Positively Negative"같은 곡들도 있었다. 그 노래들은 별로 흥미롭진 않았지만 그런일은 어떻게 노래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Geoff는 Haywards Heath에 있는 Clair Hall에서 wide데뷔를 하게되었다. “우리는 문자그대로 우리의 Geoff의 역사에서 단한번 있었던 연주를 하게되었는데... 심지어는 4명의 라인업의 상태도 아니었다.”(Brett laughs). Mat은 gig에 출연하는데 신경쓰지 않아도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Gatwick 공항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날밤 일을 해야했다. 그래서 나와 Gareth는 각각 어쿠스틱기타와 노래를 맡기로 결정했다. 그 음악들은 아마도 여태나온 음악들중 가장 형편없는 조각들중 하나였다. Proclaimers처럼.아니 그이상 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청소하는데 익숙했다.”(Mat adds) "나는 아마도 그들이 연주하고 있을때 직장에서 환자용가방들을 밖으로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Geoff는 연주곡인 “Murder Most Fiddly" 와 Breathless"이 포함된 몇 개의 demo를 녹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학이 손짓했을때 사형선고장이 밴드에게 유효적절하게 발부되었다. Danny는 전문드러머로 계속 일하게되었고 반면 Gareth는 Virgin retail shop에서 호화스런 일을 얻었다. 현명한 Mat은 정치학을 공부하는척 하고는 London School of Economics 학교로 향했다. ”학생에게 나오는 보조금을 기억하실련지..“(Mat explains)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대학에 가는 것은 최소한의 임금을 받는것과 같은것일수 있다. 그런일은 상당히 좋았고 여러분은 그에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 과목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단지 “갈만한 멋진 도시가 있나요?” 이런것이었다.
Brett은 그때즈음 Rusholme Ruffians가 Salford Lads Club에 출입했던 음악의 Mecca(성지)의 로맨틱한 영상을 마음에 품고 북쪽으로 향했다.
* Kraftwerk - 그래미상수상의 경력을가진 독일 Düsseldorf출신의 신스,테크노팝 그룹 1970년에 결성되어 현대모던음악의 모든장르에 큰영향을 미치고있음.
* Simple Minds -1978년 결성된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출신의 뉴웨이브,록밴드
* Lloyd Cole - 영국출신의 싱어송라이터,84~89년까지 Lloyd Cole & commotions의 리드싱어로써 유명함.
* Housemartins - 80년대에 활동한 영국출신 인디,칼리지록밴드,
* C86 - 1986년 NME에 의해 릴리스된 카셋트컴필레이션 앨범의 제목.인디 레이블 소속의 신진밴드들의 노래를 컴필레이션식으로 발매
* Proclaimers - 1983년 결성된 스코틀랜드 출신,포크록 팝그룹, benny & joon 의 테마송 I'm gonna be로 유명함.
* Rusholme Ruffians - smiths의 앨범 "meat is murder" 의 수록곡
* Salford Lads Club - 맨체스터의 salford시에 속한 Ordsall근교에 위치한 소년,소녀들의 레크레이션을위한 클럽,smiths가 the queen is dead의 앨범속지를 촬영하기위해 이 건물의 앞에서 포즈를 취했는데 그이후로 큰 인기를 얻은 smiths 팬들에게는 성지순례코스중의 하나.
2. Just a Girl
insatiable 2008.01.05 13:16 조회 수 : 6008 추천:1108
STRANGEWAYS HERE WE COME. 1986년 늦여름, Brett은 그의 아버지의 은청색 Austin Allegro 택시의 승객석에 올라 겉으로는 Town & Country Planning 을공부할거라고 하고 Manchester university 로 출발했다. 사실은 정부로부터 돈을 좀 뜯어내서 여자들을 만날 생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Quiff 헤어스타일에 더불어 Doctor Marten 제품의 부츠와 baggy 스타일 청바지로 코디한 별처럼 빛나는 눈의 Brett은 아마도 Manchester를 Marr와 Morrissey를 찾을수도 있는 일종의 음악으로 가득찬 동물원으로 생각했다고 말하는게 공평할 것이다. Owens Park Halls of Residence 에 거주하는 학생들의 실제모습은 그들의 괴상한 Pranks 와 도둑질당하는 Traffic cones 때문이었는지 실망스럽게도 Brett이 생각했던것과는 달랐다.
“추측하건데..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밴드들이 거기에서 살았었고 어쨌든 나도 대학의 학생으로서 오웬스파크와 연결되는 것 아닌가..하는 로맨틱한 감정을 가지고 그곳에갔다. 나는 그도시를 사랑했고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난 단지 그 학생들의 lifestyle에는 견딜수가 없었다. 먹잇감이 없나 어슬렁돌아다니는 twat들을 보고있자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그곳에 약 1년동안 있었고 정말로 그곳을 싫어했다. 꽤 실망스러웠다.”
* STRANGEWAYS HERE WE COME - 1987년 9월 발매된 smiths 의 마지막 스튜디오앨범의 제목. 악명높은 Manchester prison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
* Quiff - 1950년대 pampadour와 flattop이 합쳐진 헤어스타일,morrissey well-known for his trademark quiff hair stlye
* Doctor Marten - 2차세계전쟁에 참전한 독일군의사, 부드러운 피혁과 에어패드가 부착된 구두창을 가진 부츠의 발명자.
* Austin Allegro - British Leyland Motor사 가 개발한 작은 페밀리카(1973~1983)
* Owens Park Halls of Residence - Manchester시의 Fallowfield 지역에 위치한 기숙사.
University of Manchester 의 소유이며 1056명의 학생들을 수용함.
* Pranks - 광대처럼 행동하는 것, 재미나 놀래킴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그로테스크한 행동(트래픽콘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남을 놀리는 행동을 가리킴)
* Traffic cones - 고무나플라스틱재질의 콘모양의 교통지시물.안전한 방향으로 교통방향을 지시하기위해 도로나 도보위에 설치되는 것.
* Twat - 남을 모욕하는데 쓰이는 상스러운 최고의 욕설
Brett은 London Schools of Economics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있는 Mat을 만나고 Geoff가 끝났던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으로 남쪽으로의 전학에 지원했다. 즉각적인 전학은 불가능하다는 결정 때문에 Brett은 일년을 그냥 날려버려야할 처지였다. 그는 Manchester에서 다른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역 직업센터에서 구인광고를 이리저리 살핀그는 Cyprus Tavern 이라는 클럽이 음악을 맡을 DJ를 구한다는 것을 보았다. 평생 DJ들의 장비를 만져본적이 없었음에도 Brett은 어쨌든 여전이 이와같은 일도 최소한 음악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너무 어렵지않아야 할텐데..정말 그럴까?.”
그래서 Brett은 그의 덜알려진 1년동안 계속된 DJ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나에게있어 DJ 라는 일은, Paul Oakenfold 나 비슷한 그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수상한 인물들의 아지트였던 정말로 일하기힘든 클럽에서 문자그대로 ‘간청(요청)’ 이라는 것이었다.”
Brett의 DJ로써의 첫날밤에, 댄스홀의 경비원들은 Brett이 목격한 손님들을 덮치는 일종의공격개시순간을 브렛에게 설명했다 - Brett이 규칙적으로 예상할수있었던 - 그가 음악을 중지하면 경비원들이 댄스홀위로 몰려가서 말썽쟁이 손님들을 솎아내곤했다.
“물론 내가 완전히 이일에 적합하지않았기 때문에, 노래 한곡 한곡이 끝날때마다 결함을(브렛의 몫) 메꾸며모든 경비원들이 댄스홀에 뛰어가곤했다. ”나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을했다. 짤리지 않고 그일을 어떻게 계속할수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할따름이다.”
때때로 댄스홀에서보다 더크게 문제가 생겼다. 단골손님들은 80년대의 Pop-soul music 과 Motown풍의 음악을 요구하였고 Chaka Khan 이나 Joyce Simms 게다가 Smiths같은 음악을 슬쩍 끼워넣으려하는 이 깡마른 남부청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Brett은 수차례 저녁에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는걸 거부했다는 이유로 Manchester지역의 soul boys들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위험을 무릅썼다.
* Paul Oakenfold(1962~) - 영국 Greenhite 출신의 레코드 프로듀서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trance music DJ
* Chaka Khan(1953~) -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 ,R&B funk jazz 뮤지션,1970-1983 (with Rufus) 1978-present (solo)
"기억나는데 어느날 저녁 이 소년들의 무리가 집까지 뒤쫓아와서 나를 구타하려고 했다. 나는 대학교다닐때 만난 Emily 라는 여자와 살고있었다. 내가 우리집을 향해 걸어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뒤에 있던 차가 인도위로 올라와서는 나를 치려고했다..내가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는 이유로! . Brett은 그 지역학교의 쓰레기통에 몸을 숨겨 목숨을 구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일은 꽤 즐거웠던 다채로웠던 순간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밴드를 만들려는 원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Brett은 여분의 (Mat에게 귀중한 의견을 얻고자 그에게 보내곤했던)demo곡들을 만들면서 작곡을 계속해나갔다. “그 일은 정말 재밌었다. Mat은 demo곡들에 비평을 붙여서 나에게 다시 보냈는데, 그것들은 마치 음악잡지에 실린모양을 하고있었다 : 그는 10점을 주기도 했다. 우리둘은 그런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곤했지만, 나는 실제로 내가 생각하기에 밴드의 일원이 될 수있거나 나와 뜻이 맞아 의기투합할 그 어떤 사람도 그곳에서 우연히라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일이 잠시 답보상태속에 있었고 나는 그냥 살아가는것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Mat은 그 자신이 나와 유사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걸 알게되었다. “꽤 유쾌한 1년 이었다. 정지상태에 있었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자 Brett은 참지못하고 ‘단지 London에 있으면 좋겠다’ 라는 간단한 이유로 London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외의 어떠한 이유로 Town & Country Planning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동안에 면밀히 말하자면 초기 Suede song 이라 할 수 있는, Emily 에게서 영감을 얻은 “Just a girl" 이라는 소가곡(ditty)이 만들어졌다. Brett은 이노래를 이렇게 묘사한다, ”꽤 잘 만들어진 방랑하는느낌의 folk song 이지만 나의 어버지가 연주하곤했던 옜노래를 약간 차용했다.“
Suede는 Brett이 멤버로 새로 맞이한 Richard Oakes 와 함께 싱글 “New Generation"의 b-side곡으로 염두에 두고 어쿠스틱 듀엣으로 그 노래를 연주했던 최근의 1994년처럼 그들의 career동안 몇차례 “Just a girl"을 시도하곤 했다. 이 흥미로운 시도는 선율의 부족과 시간의 결여 때문에 빛을보지 못했고 이노래는 오늘날까지도 발매되지 않고 있다.
Just a girl, north of England way
Came to me one sweet December day
Is your heart dear as cold as your room?
I told her several times that I didn't like her tunes..
Brett은 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공부할 목적으로 1988년 London으로 다시와서 Haywards Heath 출신의 Simon Holbrook 과 Mat Osman을 포함한 일단의 무리와 함께 Finsbury Park 근처의 Wilberforce Road 에 위치한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늘어난 크고 오래된 집으로 이사했다. UCL에서 보낸 첫주동안 Brett은 Suede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었던 인물들중의 한사람을 만나게된다.
Justine Frischmann 은 어렸을때 2차세계전쟁 도중 Auschwitz에서 그의 모든 가족을 잃어버리고 난민아동들을 위한 기숙학교로 보내졌던 한 유대계 헝가리인의 딸이었다. 그는 후에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서 earth-quake-proof이라는 재단을 설립했고 또 London에 있는 가장 유명한 명소들중 그둘인 Centrepoint 와 Canary Wharf 의 설계에 참여했다. 그녀의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Justine은 사립학교로 보내졌고 그후에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UCL에 입학했다.
* Centrepoint - 영국 central london에 위치함.117 m (385 ft) high, 32 floors and 27 180 m² of floor space and is the 19th tallest building in London
* Canary Wharf - London Borough of Tower Hamlets 지역의 Isle of Dogs 에 위치한 비즈니스 쇼핑 복합건물
어느날 등록을 위해 줄을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는 그녀앞에 있는 성(sex)이 불분명한 녀석을 발견했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신이 서지않았다, 그가 핸드백처럼 보였던 그의 누이가 주었던 가방에 양귀에 귀걸이를 하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남자라면 꽤 귀엽겠는걸’ 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는 남자였다. 강의를 듣는 도중에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전에 안면이 있던 사람으로 보였고 그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Justine은 고전적인 대화를 사용해서 “This tea looks a bit weird." 라고 그에게 말을 걸 용기를 불러내기 전까지는 며칠동안 대학 주위에서 Brett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너무 긴장해서 인지 Brett은 그녀가 언어장애(말더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내가 처음Justine을 만났을때 나는 그녀를 지능발달이 늦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입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거의 혀짧은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말할 때 좋은 리듬을 가진 혀짧은 소리가나는 아주 매력적인 방법으로 말했다. 그녀는 매우 긴장해서인지 더듬거리며 말했다고 한다.
Justine은 둘이 함께 더많은 시간을 보내기위한 방법으로 Brett으로 하여금 건축학으로 그의 강좌를 바꾸도록 설득했다. 곧이어 그들은 건축학을 공부하기위해 Milton Keynes 같은 곳들로 수학여행을 가게되었다.
“나는 그에게 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것이 아름다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Brett도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져있었다. “나도 여러분들처럼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는 놀러다니면서 함께 더없이 행복한 3년을 보냈다 ; 솔직하자면 내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중 3년 이었던..나는 그녀와 멋진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Mat은 Justine과의 첫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녀를 처음만났던 순간은 Brett의 침대에서 였다.(he smiles)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난다 ; 어느날 집에 왔더니 브렛이 이 굉장한 매력적인 여자와 침대에 있었다. 그리고 서로 환하게 웃으며 앉아있었는데 분명히 첫사랑에 불타는 그런 순간이었다.”
Mat은 곧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여태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정말로 다른 사람이었다. 굉장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주 확신에 찬 사람이었다. 나의 출신지역에는 그런 스타일의 여자들이 드물었다. 그녀는 아주 좋은 비주얼감각을 가진 내가 아는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녀는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design과 사물의 생김새, record sleeves, 의류에 관해 굉장한 감각을 지녔고 완벽하게 그녀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실수가 없었다. 그리고 예술을 실제로 사랑했던 내가 만난 첫 번째 사람들중 한사람 이었다. 그녀는 New art와 아티스트들을 많이 알았고 사람들이 음악을 즐겼던 방식을 좋아했다. 나는 그런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리고 난 그녀를 부정적인 면으로써 말하는게 아니라 그녀가 정말로 야망에 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항상 어떤일이 일어나길 원한다. Brett과 나는 주위에 앉아 마리화나나 피우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는데...”
가족들중 그녀의 어머니쪽이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Justine이 어쿠스틱기타를 기본적으로 다룰수 있었음에도 밴드의 일원이 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적은 한번도 없었다.Brett을 만날때까지 그녀는 다른사람들의 레코드를 듣고 따라서 되는대로 연주하는것에 만족했었다.
“그녀는 밴드의 일원이 되는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confirms brett). “이상하게도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때 그녀가 가지고있었던 record는 Joni Mitchell 과 Astrid Gilberto 같은것들 그리고 Van Morrison 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던게 기억이 난다. ‘듣지 말자..이 음반들’ 나는 정말로 나의 음악취향에 대해서는 완고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음악이란 ‘This is my personality'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 Milton Keynes - 남동부 영국에서 가장큰 도시,1967년 뉴타운으로 설계되었다.
* Joni Mitchell(1943~) - 케나다출신의 송라이터이자 화가,196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 포크록씬의 중요인물
* Van Morrison(1945~) - 북아일랜드 태생,송라이터,포크 블루스 irish scat이 혼합된 음악,락의 역사에있어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있는 인물들중 한사람.
Brett이 결국 불가피하게 Kensington High Street에서 떨어진 Hornton Road 에있는 Justine의 플랫아파트로 이사왔을때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후에 Elastica 가 되는것에 주춧돌을 놓았던 엄한 음악적 파시즘을 강요했다. “내가 가진 모든 레코드들을 가지고와서 그녀의 아파트로 이사와서는 이렇게 말했던게 기억이 난다. ‘우린 이제 더 이상 Justine의 이 레코드들을 듣지 않을 거야.이게 우리가 들어야할 것들이지!’ 그리고 우리는 Happy Mondays 와 가져온 다른것들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게, 그녀의 음악적취향은 그때 내가 가져온 레코드들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the Fall을 들려주었는데 그녀는 그런것들을 전에 들어본적이 없었고 Happy Mondays 와 이와 비슷한 느낌의 노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것이 그녀에게 꽤 교육적인 것 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 아마도 인연,인간관계란 무엇인가?
Justine이 어느날 Brett과 Mat의 비정기적인 jam session에 참여했을때 그녀는 우연히 이 신출내기 밴드에 관심을 보였다. Brett은 그가 학교다닐때 밴드에 있었다고 말한적이 없었는데, Brett이 이야기해주자 그녀는 그의 노래들중 일부를 듣길 원했다. 연주를 듣고나서 감명받은 그녀는 Brett이 다시 부르게끔 격려해주었다.
“우리는 여전히 답보상태였다.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 밴드를 만드는것임을 알았음에도, 난 여전히 그에 대한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Brett admits) “나와 Mat은 때때로 모여서 연주하고 곡을 썼다. 나는 ‘Justice'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초기에 만난 여자친구와의 결별에 관한 노래였고 실제로 꽤 나쁘지 않은 노래다. 우리는 상당히 가벼운축에 속하는 leftfield pop 스타일인 The Lilac Time 같은 노래들을 들었다. 그것은 주로 major 7 코드 스타일의 노래였다. Justine이 우릴따라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게 기억이 난다. 그녀는 어느날 우리가 연주하는걸 들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초기 노래들중 하나인 ’Just A Girl' 이나 ‘Justice' 의 하모니부분을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이 여전히 이름하나 없는 트리오는 좀더 주위의 상황을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Brighton 에있는 한 저렴한 스튜디오에서 ‘Justice'의 demo를 녹음하게 되었다. “그곳은 한시간에 5파운드의 사용료를 지불하는 그런곳들중 하나였다. 나와 Mat,Justine은 문자그대로 드럼머쉰 파트, 보컬 파트, 일렉트릭기타 트랙, 베이스 트랙, 어쿠스틱기타 트랙을 녹음했다. 그 노래는 꽤 생생한 소리를 얻게되었다. 나는 그 당시에 그 노래를 실제로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들려줄 정도로 충분히 만족함을 느꼈다.
* Elastica - 브렛과의 결별후 저스틴이 결성한 4인조 펑크밴드
* Happy Mondays - 1980년에 결성된 영국 greater manchester 출신의 얼터너티브록 밴드. Mad Chester 의 한 시대를 풍미함.
* The Lilac Time - 1986년 결성된 영국출신2인조 밴드, 밴드의 이름은 nick drake의 노래 ‘ River Man'의 한소절에서 따옴
* the Fall - 1976년 결성된 영국 Post-punk 밴드, Mark E Smith가 재적했던 그룹
그들은 하나의 unit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그들이 Mat의 집에서 리허설을 하지 않을때면 Mat은 Brett과 Justine의 집에 들러서 소파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문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면 그것은 영락없이 Mat이 왔다는 신호였다. Mat은 그의 인생중에서 괴상한 시기를 경험하고 있는것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교를 떠났고 직업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과도기적인 순간에 위치해 있었고 일종의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
Brett은 1989년 9월 암으로 어머니를 잃는 큰 격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일에 대한 진실성은 명확하다고 할순없지만 Brett의 삶에서 이일은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짐작하는게 쉽다고할수 있겠다. “이런일은 정말로 여러분에게 그리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어서 ‘Right, I've got to get my shit together'라고 하는것과 같을 수 있다. 당신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중 한명인데 여러분은 이와같은 일로 완전히 된통 당하는 상황이다. 암이라는 것이 꽤 두려운 것이고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것에의해 점점 고통받아 건강이 악화되는걸 목격한다. 그녀는 한 남자와 Lake District에서 살았다. 이로인해 수개월마다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어머니는 87년,그 비슷한해에 아버지에게서 떠나서 이 남자와 Lake District 로 이사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보지 않았고 그녀는 분명히 암에 걸렸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암에 걸려서 곧 죽을거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런일은 정말 받아드리기 힘든 상황이다. 여러분은 실제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때가 있다.- ’What do you mean?' - 막연하게 초현실적인 일이지만 두려운 일이다. 나는 한동안 어머니를 보지못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머니를 찾아 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이런일은 봐야 좋을것없는 일이다.“
Mat Osman이 기억하기에 Brett은 이상하게도 이 명백해보이는 비극과는 동떨어진 사람처럼보였다. “Brett은 그일에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사실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정말 그렇게 행동하길 원했었는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다루었던 밴드에 있어본적이 없었다. 나와 Brett은 아주 비슷한 훈육을받고 성장했는데 정말로 영국인답게 말이다. 즉 당신이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식으로 말이다. Brett은 정말로 강인한 사람이고 스스로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왔던 이런 부류의 사람들속에 있었다. 그는 그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대부분 Brett과 Justine이 일을 처리하도록 그냥 두었다.”
그 시점으로부터 Mat은 그의 가장친한 친구에게서 명확하게 보이는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확실히 좀더 진지해졌다. 이런상태가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얼마나 관련이 있었던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그가 하는일에는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진지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을 그만두는 중대한 시기였다. 가을 어느 목요일밤에 Top of the Pops 의 또다른 비참한 episode를 시청하는 도중에 Brett이 Mat과 Justine에게 돌아서서는 이렇게 외쳤다 : “This is such a lot of fucking bullshit, garbage. 우리는 이보다 더잘할수 있는데! 간단해! 우리는 기타리스트가 필요해. 기타리스트 모집광고를 내자. 그게 우리가 해야할 일인것같아.”
바로 그다음날 Brett은 NME지에 광고를 냈다. 1989년 10월 28일자 호에 실렸다. “Young guitar player needed by London based band . Smiths, Commotions, Bowie, PSBs. No musos. Somethings are more important than ability. Call Brett."
두사람이 응답해왔다. 한사람은 기타를 가지고있었던 한 사내였고 나머지 한사람은 깡마른체격의 19살의 Bernard Butler 였다.
* Muso : 음악가
* Commotions : Lloyd Cole(1961~) 이 84년부터 89년까지 이 밴드의 리드싱어로 활동했다. Lloyd Cole & Commotions
* PSBs - Pet Shop Boys
“No musos,, 이말은 꽤 고전적인 스타일 아닌가!” 버나드가 작년후반에 했었던 Guitarist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뭘 해야할까? 그냥 나타나서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자리에 앉아서 이 아주 괴상하고 다양한 유력후보들을 주위깊게 선택하고 있었다. 그게 나의 주의를 끌었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미쳐서 완전하게 폐물이 되거나 또는 그들이 정말로 달라지기위해 노력하거나 둘중 어느 한쪽이될거라고 생각했다“.
Bernard는 1970년 3월 1일, East London에서 한 아일리쉬계 가톨릭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Tottenham과 Enfield에서 성장했다. 네 살때 그는 Brotherhood of Man의 달콤한노래“Save All Your Kisses For Me"의 카피본을 손에 넣었지만 몇년이 흘러 Blondie의 Parallel Lines를 구입해서 그 자신을 구해낸다음 Jam 과 Neworder 그리고 Smiths를 들으며 서서히 변화해나갔다. 그는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그로인해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된후 바이올린을 그만 두었고 그의 형들중 한명의 소유였던 기타를 우연히 손에 넣은 후로는 절대 뒤돌아 보지않았다. 15살경 Bernard는 보컬을 맡았던 그의 형 Phil(그들의 큰형 Stephan은 가사를 썼다)과 함께 시작했던 한 밴드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있었다. Slowdive (Creation 레코드사 소속의 Shoegazing band들과 혼동하지 마시길..)라는 이름을 얻고 리듬섹션으로 나머지 두형들이었던 Kevin과 Eugene O' Sullivan을 끌어드린 이 밴드는 학창시절 Brett과 Mat이 시도했던 Geoff 보다 좀더 오래 활동하였다. Slowdive 는 네명의 멤버들이 학교를 떠난후(Bernard는 Mile End 지역에있는 Queen Mary College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게된다.) 해체되기 전까지 용케도 두세번의 church hall에서의 gig을 할수있었다. 그들은 버틀러형제의 원래의 곡들외에 Smith나 Cure의 커버곡들도 연주했다. 그는 그 이후로 쭉 새로운 밴드를 찾고있는중이었다.
Brett : Bernard가 전화해서는 이렇게 말했던게 기억이 난다. ‘수년동안 음악잡지를 봐왔는데, 당신이 언급한 밴드들을 보고나서 이렇게 전화하게되었습니다. 이 모집광고가 내가 대답하기원해왔던 첫 번째 광고네요.’ “나는 주요 밴드였던 Smiths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Bernard 가 Bowie를 자세히 알고있었다고 생각하지않는다. 그가 Pet Shop Boys를 좋아했다는것도 안다. 버나드의 응답은 아무래도 ‘No musos’ 라고 적힌 모집광고의 문구와 관련이 있었다. 밴드들이 내는 대부분의 구인광고는 아주 포커페이스적이고 전문적이다. 나와 Justine ,Mat은 -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었다“ 라는 관점에서보면 - 우리 세사람은 많은 야망을 가졌지만 조금 덜 현실적이었던..우리는 기본적으로 꿈꾸는3인 이었다. ‘우리는 프로페셔널한 밴드다’ 라는 말을 넌지시 암시하는 광고를 낼수 없었다. 꽤 교만하지 않아야 했다.”
* Brotherhood of Man - 1980년 영국에서 결성된 팝보컬그룹, Save All Your Kisses For Me라는 노래로 1976년 Eurovision Song Contest에서 입상함.
* Parallel Lines - Blondie가 1978년 발표한 세 번째앨범.그들의 앨범중 가장있기있고 많이 팔린앨범.
* Blondie - 미국에서 결성.1970년대 초기 미국 punk rock 과 new wave 씬의 선구자적인 밴드
* Jam - 1972년 영국에서 결성된 3인조밴드, 1970년대말과 80년대 초 English punk rock과 mod revival로 유명함. paul weller 가 이밴드의 출신이다
Brett은 원래 Bernard가 언급한 길 아래에 위치한 한 선술집에서 만나기로 그에게 제안했다. “당신을 어떻게 알아볼수 있을까요, 당신은 카네이션을 달고 계실건가요?” 그들은 Highlever Road W10에 위치한 Mat의 플랫식아파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Mat의 아파트는 Brett이 Justine과 이사해서 나가기전에 한동안 거주했었던 밴드의 본부역활을 담당했었다.
“그래서 버나드가 나타났는데 내가 본 그에대한 첫 번째 인상은 그가 꽤 강렬해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섬세하고, 매우 추진력있으며 그가 하고 싶어 하는일에 매우 진지한 듯 보였다.” Bernard는 그시간 내내 말을 아꼈는데, 그의 엄숙함은 그가 Justine으로부터 “Laughing boy"라는 별명을 얻는 원인이되었다. ”What Difference Does It Make"의 음표하나 틀리지않은 연주를 포함해서 그는 그의 Epiphone guitar로 몇곡을 대강 연주했다. Mat에 따르면 이 상황이 Suede가 태어난 시점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러분은 그때 당시 나와 Brett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모를거다. 우리는 무대에 오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Bernard는 굉장했다. 버나드가 가세한 그순간 이후부터 우리밴드는 굉장한 뮤지션을 얻게된 것이다. 전에는 ‘이거정말 사람이 먹을게 못되는데’ 하고 생각했다가 갑자기 이것을 사람들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동시에 이 트리오가 그당시 Bernard에게 줄 수 있는 어떤 무언가가 존재했었음이 틀림없었다 : 이 세명으로 이루어진 unit은 Bernard가 찾고있었던 밴드가 충분이 될 수있었다. “그는 우리의 음악을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This is shit'.(Brett says) ”우리에게 없었던 부분이 그에게 있었고 그에게 없었던 부분이 우리에게 있었다. 우리는 야망있는 몽상가들이자 낭만주의자였다. 그러나 Bernard는 연주를 할수있었다.“
그 두당사자들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Bernard가 자리에서 일어났을때 갑자기 그들에게 돌아서서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여러분들 나이가?”
“어, 스물둘” 그들이 대답했다.
“여러분들 서둘러야 할것같은데요?"
그래서 그들은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 Smiths가 1984년 발표한 싱글, 앨범 smiths와 hatful of hollow에 실렸다. 모리씨가 덜 좋아하는 싱글들중 하나였지만 UK차트 #12에 오름.
* Epiphone - Epiphone사 가만든 기타,1950년대 후반 Gibson사에 의해 밀려나기전까지 a steel-stringed, Archtop guitar(블루스,재즈용 기타) 분야에서는 깁슨과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4. Moving (01)
floweret 2008.03.10 00:47 조회 수 : 6447 추천:912
아아 밑에다가 이번주에 다 해서 올리겠다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슴당. 몇 번 읽었다고 해서 내용을 제대로 아는게 아니었다는. 아 정말 영어 딸립니다. 일단 시작이 반이고, 약속을 했으니 일부라도 먼저 올리겠습니다. 음..한 3-4회에 걸쳐서 올라갈 것 같구요.(쫌 길어요ㅡㅡ;;) 올리면서 계속 내용의 오류는 수정할께요.
4. Moving-1
일반적인 방식으로 몇 달간을 드러머 찾기에 지친 후, 스웨이드는 우연히 25살의 펑크가이를 만나게 된다. 그는 스웨이드 매니저 중 한 명의 사무실에 데모테잎을 두고 간 Startford출신의 청년이었다. 그 당시 밴드는 특수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이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웨이드를 돌봐주는 3개의 각각 다른 대학교 연합 엔터테인먼트 매니저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중에 브렛은 이렇게 설명한다. “ 당시에 우리는 Ricky Gervais과 Norm, Nardir에 의해 매니지되었죠. Nadir는 Queen Mary College에서 버나드를 알았고 그래서 우리가 그를 만나게 된 거죠.”
Nadir라는 이름의 아이러니는 저스틴도 인정한다. “Nadir는 인디언 이름이고 그것은 절정(천정)의 반대죠. Nadir는 바닥을 의미하고, 실제로 그 단어는 그 당시의 요약이나 다름없었어요. Nadir가 사랑스런 사람이어서 그에게 우리의 상황과 관련하여 이름을 가지고 무례하게 굴진 않았지만 그 당시 우리의 활동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어요."
Ricky-후에 The Office의 스타가 되었고 크리에이터로서 명성을 얻은-와 Norm은 모두 런던 유니언 대학에 있는 Ents오피스에서 일했다. “데모를 들었는데, 그 안에는 트랙이 두 개 있었죠. “Wonderful Sometimes”는 정말 좋다고 생각했고 ‘Natural Born Servant’는 썩 좋지는 않았어요. 다소 dirgey하다고나 할까. 내 생각에 브렛이 그의 음역보다 좀 아래로 부른 것 같아요.” Ricky는 회상한다. “그것은 ULU에 있던 내게 보내졌고, 당시 Queen Mary’s에 있던 Ents 매니저였던 Nadir Contractor는 말했어요. ‘그 데모 들어봤어?’ 그리고 내가 말했죠. ‘안 들어봤는데, 그거 괜찮아?’ 그가 ‘정말 좋다’고 대답했어요. 그는 내게 그것을 틀어주면서 자신이 이들을 매니지하고 싶은데 함께 하자고 제안했어요. 왜냐면, 내가 A&R(Artist& Recording)을 알았고 음반취입을 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음반 산업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명의 ULU에 있던 매니저인 Norm은 우리가 스웨이드를 함께 매니지할거라고 말했어요.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사실 Norm이 Nadir에게 대부분의 골치아픈 현장업무들을 맡길 것임을 확신했구요. 나는 그가 지금까지 만나 본 어느 누구보다 음악 산업에서 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셋은 미팅을 했고 스웨이드로부터 매니징을 해 달라는 답을 받았죠.”
Simon Gilbert또한 ULU에서 일했다. “그는 티켓 샵에서 일했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일했죠” Ricky가 말한다. “사이먼은 음악을 좋아해서 항상 음악을 너무 크게 틀었어요”
“그가 이 테잎을 틀었고 나는 누구냐고 물었죠” 사이먼이 회상한다. “그리고 Ricky가 ‘내가 매니지하는 밴드야’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드러머가 없으니 내가 오디션을 볼 수 있는지를 물었고 Ricky는 말했죠. ‘넌 나팔바지도 입지 않고 층머리도 하지 않았잖아!’ 사실상, ‘넌 오디션 볼 수 없어’라고 말한거죠.”
Simon은 14살 이후로 밴드 생활을 했다.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 처럼, 그리고 그들 중에는 브렛 앤더슨이 그랬던 것 처럼, 촉매재는 펑크락이었고 특별히 섹스 피스톨스의 영향을 받았다.
“Never Mind The Bollocks”를 들었을 때 울 뻔했어요” 사이먼이 웃는다.
“그것은 예수를 보았을 때와 같은 구원이었죠. 나는 머리를 잘랐고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그때까지는 누구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었지만, 내가 펑크가이가 되자마자 모든 여자들이 나를 사랑했고 모든 애들이 내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죠. 나는 도시 전체를 통틀어 펑크헤어를 한 가장 첫 번째 사람이었던 거죠. 내가 요란한 체인들을 달고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경찰이 불러세웠던 일이 기억나요. ‘너 개 끌고 나왔어?’ 어디있어? 왜 그 체인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거야? 그는 내 차림새를 이해조차 못했어요. 나는 코너를 돌아 걸었고 거기서 영화를 찍고 있었던 Toyah Wilcox를 발견했어요. 그 때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살았구나. Stratford에 나 말고 또 한 명의 펑크 가이가 있구나!”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인 Stratford는 Haywards Heath(브렛의 고향)보다도 더 펑크의 고향 런던에서 훨씬 멀었고, 젊은 사이먼은 런던이란 곳을 극단적으로 로맨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런던에 대해 동경해왔어요. 내가 지나던 다리 밑에는 둥근 모양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지하철의 표시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철을 타고 런던에 간다고 상상하곤 했어요. 우리는 짧은 당일 여행을 떠나서 (서 런던에 있는)Kings Road에 도착했어요. 아침 6시에 도착했기 때문에 모두 닫혀 있었고 Safeway에 가서 우유 1파인트를 훔쳤어요. 분명 돈이 충분했지만 그게 펑크가이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거죠. 우리는 Seditionaries and Jordan에 갔고 거기에는 Vivienne Westwood가 있었어요. 나는 물었죠. ‘Malcolm은 어디있나요?’ 그리고 그녀는 대답했어요. ‘그는 아동섹스필름의 승인을 얻기 위해 유럽법원에 가 있어요!”
Simon의 첫 번째 밴드는 kathi Jeary라는 여자가 프론트맨인 Dead to the World였다. 그들은 Stratford 인접해 있는 Wilmcote Village Hall에서 데뷔했다. 그 때 사이먼은 불과 15살 밖에 되지 않았고 트랙까지 하나 발매했다. 그것은 Action Man이라는 트랙인데 Crass Record사의 전절적인 1984년작 Bullshit Detector 콤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어 있었고 스웨이드의 디스코그라피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그 때부터 그는 쭉 Plastic Blood, the Hop, Flack Off, Sirens of Seventh Avenue, The Abstract, the Probes, the Shade등을 포함한 일련의 밴드들을 해왔다. 몇 개는 런던에서 했고 몇은 당시 재정 상태때문에 집에 돌아와서 했었던 것들이다.
“ 나는 단지 런던으로 돌아갈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이 아닌 다른 일에 시간을 허비했어요. 나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았고 이번에 성공시키지 못하면 다 포기하고 청소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어요. 실제로 시작하기도 했었죠. ’The Cleaning Company’라는 이름이었죠. 청소에 관한 계약을 하고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간당 10파운드를 얻을 동안 시간당 5파운드로 청소를 할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정말 돈 버는 손쉬운 방법이자 매우 참신한 기획이었어요. 제가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으나 그동안 너무 많은 밴드들을 전전했기 때문에 이번에 대박이 나지 않으면 나는 그만둘 거였어요. 그리고 이번에 천만다행하게도 대박이 난 거예요."
스웨이드는 그에게 있어 행운의 열 세번째 밴드다. 처음에 그가 스웨이드에 지원하려는 것을 거절한 보스(Ricky)를 극복하고 기회를 얻어내는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스웨이드에는 평범한 수 많은 밴드와는 다른 뭔가가 있었어요. 내가 느끼기에 스웨이드에는 완벽한 엣지(날카로움/개성)가 있었어요. 나는 Nadir가 QMC에서 그들을 공동 매니징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에게 내가 일원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 예스라는 답을 받아냈지요”
리허설은 3월 21일에 Premisis에서 열렸다.. “나는 다른 비트로 ‘Be my God” 을 연주한 후에 잘 못했다고 생각했죠” 사이먼이 회상한다. “그리고 브렛은 첫 연주에서 내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밴드는 사이먼의 연주를 좋아했고 시험삼아 일단 그를 합류토록 하였다.
브렛은 애정어린 톤으로 말한다. “싸이먼은 우리와 지내면서 6개월 동안 정말로 기술적인 탁월한 면을 보여줬어요. 그러면서도 아직도 견습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까요! 나는 그가 이제 밴드에 계속 있어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야 비로소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이먼에게 스웨이드 멤버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렇게 물어본 것은 정말 예의 바르고 부끄럼 많은 거였죠. 하지만 그게 사이먼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예나 지금이나 사랑스럽고 따뜻한 젠틀맨이죠.”
4번의 리허설이 끝마치고 1991년 4월 30일에 새로운 라인업의 첫 번째 기그가 Covent Garden의 록 가든에서 열렸다. 그 곳은 자체로는 별 볼일 없는 곳이었지만 9년 전 Smiths가 런던 데뷔를 했던 유서깊은 장소이다.
사이먼의 기용은 밴드에 즉각적이고 확실한 효과를 가져왔다. 초창기 스웨이드가 드럼머신으로 만들었던 많은 음향효과들은 완전히 버려졌고 사이먼은 그 조악한 효과들을 혐오했기 때문에 더욱 빨리 그것들을 없앴다. “Art”는 다시 연주하지 않았고 다른 노래들은 그의 고집대로 재편집되었다. 스웨이드의 불행하고 촌스런 시기의 모든 흔적은 곧 지워졌다.
“Maid in London은 완전 꽝이었어요. 나는 정말 그 노랠 혐오했어요.” 사이먼이 말한다. “ 나는 확고했어요. 이 노래를 연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은 정말 끔찍했어요. 그것은 Stone Roses의 ‘I Am The resurrection’의 비트와 비슷했어요. 나는 정말로 그걸 싫어해서 브렛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어요. ‘우리 이거 연주 안 하면 안 돼?’’ 그래서 우리는 안 했어요. 우리는 다른 4곡에 몰입할 수 있었어요.”
운좋게도 이 시기, 버나드와 브렛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왕성한 창작의 시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이먼의 펑크 성향이 완전히 반영된 “Painted People”, “The Drowners”그리고 “Moving”은 모두 이 기간에 나왔다.
“나는 그가 스웨이드에 합류하기에 앞서 그런 방향에서 이미 충분히 자신만의 스타일리시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Justine은 인정한다. “ “어떻게 그렇게 훌륭해졌느냐고 묻는다면 난 그게 다 사이먼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처음 비트를 넣었던 것 중 하나가 “The Drowners”였어요. 그는 도착해서 자기식대로 밀어부쳤고 그 비트를 고안해내었지요. 그것은 ‘Yup’처럼 들렸고 완전히 새로운 노래처럼 들렸어요. 내 얘기는 그것이 그 동안 Justine도 드럼머신도 결코 못 했고 영원히 하지 못할 특별한 비트라는 말이예요."
4. Moving (02)
floweret 2008.03.17 18:04 조회 수 : 5618 추천:1181
4장 두 번째 번역입니다. 이번 장에는 브렛이 저스틴과 헤어지면서 슬픔을 곡을 쓰면서 승화하는, 그리고 밴드의 기량이 하늘을 찌르는..(글쎄, Moving과 Pantomime Horse를 같은 날 하루에 썼답니다. 원문대로 정말 insane한거죠!) 브렛과 저스틴과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읽었더니 마음이 매우 아프더라는..이번에도 역시나 오류는 차차 수정할께요. (퍼가시면 챙피합니다..) 암튼 읽어보세요~
Moving 02
사이먼의 합류시기에 맞춰 고통스럽고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밴드 내의 좀 더 사적인 문제였다. Damon Albarn과 Justine의 관계가 더 이상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게 된 것이다. 5월에 Blur의 두 번째 싱글 ‘There’s No Other Way’가 탑 텐으로 진입함에 따라 Brett은 그의 라이벌에게 Justine을 양보하고 그녀의 집에서 나와야 했다.
“Justine과의 결별은 많은 것들과 관련이 있었어요.” 브렛은 인정한다. “그것은 스웨이드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하는 진정한 밴드로 변모하는데 촉매제가 되었죠. 저스틴과 헤어졌기 때문에 다스려야 할 크나큰 감정의 동요는 순전히 개인적인 고뇌였어요. 그 괴로움은 페이지 위로 뛰쳐나왔고 거기에는 박차고 일어나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싶은 욕망이 담겨 있었죠.
브렛은 예전부터 그의 속마음을 음악을 통해 더 강하게 표현했고 친구들에게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어요. 그것은 우리가 별로 이야기하지 못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어요." 맷이 인정한다. “브렛이 실연에 대해 실제로는 쿨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어요. 그 둘은 그들이 가능한한 가장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브렛이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죠. 저스틴은 앨범 런칭 같은 블러의 행사에 우리를 초대하였고 그게 조금 서먹한 이상한 시기가 되었죠.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죠.”
그 시기 브렛은 마음의 상처가 크지 않은 척 했지만 실은 매우 상처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재정 문제에 봉착했다. 브렛이 저스틴의 아파트에서 살던 3년간을 사이먼은 “간지나던(Well Swanky)”시기 라고 까지 말하는데, 그녀의 집을 나온 이후로 브렛은 매우 쪼들렸다. 그는 제일 친한 친구인 Alan Fisher, 그리고 그의 거북과 함께 Notting Hill의 Moorhouse Road에 있는 매우 협소한 원룸 아파트로 이사갔다. Alan Fisher는 Haywards Heath에서 보기 드물었던 공립학교 중퇴자였고, 그의 거북 Cliffy는 앨런이 펄펄끓는 물이 나오는 목욕탕에 두고가 죽일 뻔했던 가엾은 거북이다. Alan과 그 아파트는 이후 브렛이 전성기 시절 10년간 지속될 쾌락적인 라이프스타일로 돌입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브렛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나와 헤어졌죠. 우리의 이별은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이별이었어요. 일어났어야 할 일이긴 하지만 힘들고 충격이 큰(트라우마틱한) 것이었죠.” 저스틴은 말한다. “나는 앨런과 함께 아파트를 구하도록 브렛을 도왔어요. 그 아파트는 Powis Square지역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고 Notting Hill의 멋들어진 보헤미안 분위기로 충만한, 조그맣지만 매우 멋진 아파트였죠. 앨랜은 항상 약(drug)을 달고 살았고, 내 생각엔, 브렛이 자신의 슬픔을 닥치는대로 무엇에든 떨쳐버리려 했기 때문에 상태가 점점 더 제어할 수 없게 되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Es는 했지만 코카인이나 딴 것들은 안 했어요. 대마초를 좀 피웠지만 중독 수준은 아니었어요. 약을 한다기보다 호기심 같은 거였죠. 또 우리가 학생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브렛은 나와 헤어지고 난 후에 실제로 약물에 빠졌어요. 약으로라도 슬픔을 지워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애정문제나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함께 살면 당연히 어떻게 사는지 눈으로 볼 수가 있잖아요.” 앨런이 말한다. “그에게는 함께 있을 친구가 필요했어요. 언젠가 브렛은 내게, 자신에게는 밴드가 가장 중요하고 저스틴이 떠났을 때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 것도 밴드라고 말했죠.”
브렛과 앨런은 Nicholas Roeg의 고전 컬트인 ‘Performance’에 나오는 Mick Jagger에 심취했다. “나와 앨런은 그 비디오를 닳아 빠질 때까지 보았어요.” 브렛이 인정한다. “Moorhouse Road에 있는 우리 아파트는 히피 분위기가 넘치는 아편굴 같은 곳이었죠. “
우연찮게도 그 필름의 배경은 Notting Hill의 Powis Squre로, Moorhouse Road와는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앨런은 그 시절의 생활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파티 따위에는 가지 않았어요. 참 폐쇄적이었고, 친구도 별로 없었죠.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나무 마룻바닥과 보헤미안 스타일의 커튼과 양초, 그리고 구슬들과 , 꽃들에 둘러쌓여 지냈죠. 그 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어요. The Man Who Fell To Earth”같은 데이빗 보위의 필름에서 뛰쳐나온 듯한, 참으로 매혹적인 아파트였죠.
“ 우리 집 윗층에는 Kevin이라는 갱스터가 살았어요. 그는 브렛과 내게 정말 정말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죠. 우리는 진짜 그 아파트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틀어박혀서 지냈어요. 만약 거기에 담배 자판기가 있었다면, 우린 2년간 아파트 출구를 한 번도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Kevin의 집은 바로 한 층만 올라가면 되어서 자주 들렀어요. 그는 완전히 약에 찌들어 살았어요. 거기서, 유랑하는 히피 커플 같은, 참으로 아름다운 친구들을 만났고 브렛은 그들과 둘러앉아 기타를 쳤죠. 우리는 약에 만땅 취해서 Kevin네 집에 널부러져 있곤 했어요.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서 밴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삐걱거리기는커녕 유대가 더욱 공고해졌다. “참 이상한 시기였어요. 우리는 갈라졌는데, 더 이상 저스틴과 내가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나드와 나는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었죠.” 브렛은 말한다. “앨런은 늘 좋은 친구였어요. 그가 내 곁에 있었고, 버나드 또한 친구로서 내 곁에 있었죠.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초창기 나와 버나드는 좋은 친구였어요. 그 때는 저스틴이 아직 밴드에 남아있던 묘한 시기였죠. 그 때 ‘Pantomime Horse’같은 곡들을 썼어요.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시 내 자신의 비극을 기리는 노래였죠. 그 곡은 내가 완전히 우울했기 때문에 나온 곡이 맞아요. ‘He’s Dead’같은 곡도 마찬가지고요…내가 행복했다면, 쓰지 못했을 곡들이죠. 맞아요. 그것들은 불행의 산물이었어요."
저스틴 또한 새로운 가사들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매우 명백했어요. 참으로 어두웠죠.” 그녀는 한숨을 쉰다. “리허설 때였죠. 우리는 ‘Pantomime Horse’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는 ‘I’ll be gone by the end of the year(나는 이 해의 끝자락에 사라질 거야.)’라고 노래했죠. 나는 실제 엔딩이 ‘Did you ever go round the bend’인지 당시에는 몰랐기 때문에 그가 부른 게 실제 가사인줄 알았어요. 그는 한동안 깨질 듯 위태위태했고, 정말로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모두가 그를 많이 걱정했어요. 나는 벌어지고 있는 일이 너무나 끔찍하다고 느꼈죠. 그렇지만 내가 Damon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깨질 것을 알았어요. 우린 사랑에 빠진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이가 발전했던 거죠. 매우 가까웠고 항상 함께 있었고..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나 많았어요. 브렛은 너무나 정직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가사를 썼고 점점 더 그건 듣기 힘들어졌어요. 나는 그가 힘든 상황에서 그런 멋진 가사를 쓰는 것이 대견했죠. 그리고 나는 그가 이제 그만 좀 했으면(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면)하고 기대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걸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건 슬프고 힘든 일이었어요."
“나는 그녀가 말한 스타들을 위해 죽을 거예요.’(I would die for the stars she said)라는 가사는, 데이먼이 유명스타였기 때문에 브렛대신 그를 택했던 저스틴에 대한 언급이었죠."라고 앨런이 덧붙인다. “그 가사는 자전적인 거였죠.”
브렛에게 분수령이 된 곡은 “The Drowners”였는데, 이 곡은 1년 후에 밴드의 첫번째 싱글이 된다. 쿵쿵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전성기 Adam And The Ants처럼 울려퍼지는 인트로, 위태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타 리프와 옥타브를 뛰어넘는 코러스- 그것은 마치 “Somewhere Over The Rainbow”와 “Starman” 으로 시작되는 3부작의 완결판처럼 느껴진다- 유희하듯이 뒤틀려진 가사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곡은 밴드의 역량이 일취월장한 것을 보여준다.
“ 닫혀있던 문을 여는 열쇠를 갑자기 찾아낸 것과 같았어요.” 브렛이 흥분하여 말한다. “그것은 실로 영적인 경험이었고, 내 삶이 바뀌리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죠.”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들 자신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테잎을 틀어 “The Drowner”를 들려줬던 날을 기억해요. 그 때 나는 오 마이 갓! 너 제 2의 데이빗 보위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죠. 앨런이 말한다. “그건 짱 좋았어요. 나는 정말로 확신했죠. 나는 그 때부터 완전히 그를 믿게 되었죠. 이후로 나는 스웨이드의 열렬한 팬이 되었어요. 아마도 브렛은 내 삶에 세 가지 중요한게 있었다고 얘기할 거예요. 스웨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코카인. 나는 그 중 스웨이드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브렛이 나와 룸메이트라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말이예요. 만약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수년을 살 수는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만나기 이전부터 똑같은 음악적 취향을 지니고 있었죠. 나는 펑크와 데이빗 보위와 함께 자랐어요.(Hunky Dory는 시종일관 내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만나기 이전이었죠.”
이런 획기적인 진보 후에 그들은 절대 퇴보하지 않았다. 브렛과 버나드는 서로의 음악적 조예에 중독될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1년 동안의 답보상태에서 벗어난 스웨이드는 비로소 어젠더를 확립했다. 그것은 그들 음악의 양대 핵심요소인 빼어난 지성과 격정을 분출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다 좋았거든요.” 브렛이 말한다. “ 일단 한 번 ‘곡 쓰기’라는 방문을 열고 난 다음에는 나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아주 멋졌죠. 나는 우리가 ’Moving’, ’Pantomime Horse’를 같은 날에 쓴 걸 기억해요. 완전히 신들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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