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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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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형성과 선사 문화

인류의 출현과 우리 민족의 형성

현재 알려진 최초의 인류는 약 390만 년전 아프리카 동남부에서 출현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이다. 뇌용량이 크며 대가리가 크다 불과 언어 도구의 사용

  •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것은 구석기시대 부터이다
  • 우리 민족은 신석기 시대에 만주와 한반도를 터전으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몽골 인종의 한 갈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모습

  • 구석기인들은 뗀석기를 사용하고, 열매 채집이나 사냥 물고기잡이 등으로 식량을 구하였다.
  • 정착된 생활이 아닌 이동 생활을 하며 동굴이나 바위에서 살았다, 또한 동굴에 벽화를 그리며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평양 상원 검은모루 동굴, 충남 공주 석장리, 경기 연천 전곡리가 대표적인 유적지

  •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구석기인이 살기 시작한것은 약 70만년 전부터이며, 이 시기에는 뗀석기와 뼈도구를 사용했다.
    • 초기에는 찍게와 주먹도끼 등이 등장하고, 한개의 석기를 여러 목적으로 이용
    • 구석기 시대 이후에 석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돌날과 좀돌날이 제작되어 사용
  • 구석기 시대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였으며 경험 많은 연장자가 그룹을 이끌었다
  •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 가는 시기에는 기온이 상승하면서 다양한 동식물이 출현하였다 -- 이를 위해서 석기를 작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모습

  •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며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로 발전
    • 한곳에 정착하여 움집을 짓고 살며, 정교한 간석기로 농기구를 만들며,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조리하고 저장
  • 이 시기에는 다양한 형태와 용도를 가진 간석기 와 곡물의 저장과 조리를 위해 토기도 제작하였다.
    • 신석기 시대의 대표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는 서울 암사동, 경남 김해 등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 되었다.
  • 신석기인들은 곡물을 경작하고 재배하는 농경 생활을 하였고, 이때 동괭이나 돌삽 등의 간석기와 동물의 뼈나 뿔로 제작한 농기구를 이용하였다. 또한 농경외에도 짐승을 키우는 목축 생활을 하였다.
    • 그럼에도 사냥과 채집, 물고기잡이는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였다.
    • 활과 창으로 사냥을 하고, 그물과 작살 뼈로 만든 났기 등을 이용하여 물고기 잡이도 하였다, 또한 가락바퀴나 뼈바늘을 이용하여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조개껍데기 예술품이나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의 예술품을 만들었으며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태양이나 특정 동물, 영혼등을 숭배하기도 함

신석기 시대 집터 유적(서울 강동)

고조선의 성립과 여러 나라의 성장

청동기 문화의 형성

농업 생산력이 커지며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였고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는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빈부 격차와 계급이 발생했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 청동기 문화가 보급되었다.

  • 이 당시 청동기는 주로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 거울 등 주로 무기와 제기, 장식품에 이용되었으며, 농기구들은 주로 석기로 만들어 졌다.
  • 당시 사람들은 반달 돌칼 등과 같이 더욱 발전된 석기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민무늬 토기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 농업은 주로 조, 피, 보리, 수수.등 밭농사 중심이었으나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도 하였다.

청동기 시대에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적은 청동제 무기를 사용해 주변을 정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족장이 등장하게 된다

  • 족장은 제사와 정치를 모두 주관, 하늘의 자손이라 자처하며 청동 검, 청동 거울, 청동 방울 등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움.

지배층의 무덤이였던 고인돌, 농사의 풍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그리던 바위그림 등이 있다

울산 울주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 탁자식 고인돌 (인천 강화)

철기의 보급과 사회 변화

기원전 5세기 경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 초기에는 청동기와 혼용했지만 철기가 확산되며 청동기는 주로 제사용 도구로 사용

  • 이 시기 한반도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세형동검과 잔무늬 거울 등이 제작되었다.
    • 독자적인 청동기 제작은 그 틀인 거푸집의 존재로 알 수 있다.
  • 철기는 청동기에 비해 흔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고 인구도 늘어났다
    • 하지만 전쟁도 증가했다

철기 시대에는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이외에 덧띠 토기, 검은 간 토기 등도 이용되며, 독 무덤이 만들어 졌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화폐가 있다

  •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

고조선의 성립과 변천

청동기가 사용됨에 따라서 권력을 가진 군장이 출현하였다. 강한 군장이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며 지배 영역을 넓혔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등장한 것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 이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을 건국했음을 알 수 있다.
  • 고조선은 랴오닝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이는 비파형 동검탁자식 고인돌 의 출토 범위를 통해 추정 가능하다.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는 위만이 중국 연에서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세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꼈지만, 세력읠 키운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철제 무기를 이용하여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조선이 강성해져 한을 압박하자 한 무제는 대군을 보내 고조선을 공격한다. 고조선은 패수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완강히 저항하지만 지배층의 내분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고조선의 정치 조직과 사회 모습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은 왕권이 세습되면서 정치 조직이 안정되었다.

  • 삼국 유사에 나오는 풍백, 운사, 우사에 해당하는 관직은 농사와 형벌 등을 관리하였다.
  • 이후 국가가 발전하며 왕 밑에는 비왕, 상, 경, 대부, 대신 , 장군, 박사라는 관직을 두었다

고조선에는 8조의 법이 있었다 현재에는 이중 3가지만이 전해지는데, 이를 통해 고조선 사회가 계급 사회였다는 점,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존중하고, 사유 재산의 개념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멸망후 한 군현은 엄격한 법을 만들어 토착민을 통제하였다

  • 법 조항이 60개로 늘어났다.

여러 나라가 성장하다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장하였다 enter image description here

부여

만주 쑹화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5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 형태로 성장하였다. 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부족장이 있었다

  • 이들은 사출도로 불리는 행정 구역을 다스리고 훙년이 들면 왕을 폐위 시키기도 함

부여에는 왕이 죽으면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과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 또한 도둑질 살인등을 처벌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12월 에는 영고라고 불리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의 졸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산간 지대여서 농사가 힘들었기에 정복전쟁을 하였다.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고한의 군현을 몰아내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고 옥저를 정복해 소금과 해산물을 공물로 받았다

부여처럼 고구려는 5개의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으로 왕 밑에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 등 제가들이 있었고, 제가 회의를 열어 중대한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함

고구려는 남자가 처가에서 살다가 돌아가는 서옥제라는 혼인 풍속이 있었다 10월에 추수가 끝날때 동맹이라는 제천행사가 있다.

옥저와 동예

함경도 및 강원도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었고.각 읍락에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다.

  • 이로 인해 강력한 정치권력이 성장하지는 못했다

옥저는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속이 있었다. 또한 가족이 죽으면 가매장을 하였다고 뼈만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넣었다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하였고 다른 부족의 경계를 침법하면 가축이나 노비로 변상해야 하는 책화의 풍습이 있었으며, 같은 씨족끼리는 결혼 하지 않는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다

삼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교역 과정에서 진은 고조선의 방해를 받았다. 진은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유민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고,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미한, 진한, 변한으로 발전 하였다.

  • 후에 이들은 삼한이라는 연맹체로 성장하였다.

삼한에서는 신지,읍차 등으로 불리는 군장 세력이 성장하였고, 종교적 지배자로는 천군이 있었다.

천군은 제사를 주관하고 신성 구역인 소도를 다스렸다.

삼한은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하여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철제 농기구로 벼농사를 많이 하고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계절제를열었다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

삼국과 가야의 발전과 대외 관계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여러 나라들은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삼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이러한 연맹 왕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되면서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고구려의 성립과 체제 정비

고구려는 1세기 초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삼국 중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1세기 후반 태조왕은 옥저를 정복하여 청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는 등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2세기 후반 국천왕은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부족적 전통의 5부는 방위를 의미하는 5부로 개편되고 이후 행정적 성격으로 정착되었다

4세기 초 미천왕때는 낙랑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우역을 확보하지만, 이후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등의 위기를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내부 체제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 불교를 수용
  • 태학을 설립해 인재 양성
  •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
    • 이러한 개혁을 통해서 고구려의 중앙 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백제의 성립과 체제 정비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내려온 이주민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성립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의 아들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하고 또 서울 석촌동의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이 고구려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백제의 지배층은 우수한 철기 문화를 소유한 이주민 집단이 이루었다

백제가 자리잡은 한강 유역농경하기 적당했고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유리하였다. 백제는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의 토대를 만들었다.

  • 오아 아래에 6좌평을 비롯한 광등과 공복을 제정하여 위계질서를 확립하였다
  • 밖으로는 북쪽의 낙랑군과 싸우며 한편으로 만쪽의 목지국을 제압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했다.

신라의 성립과 체제 정비

신라는 경주 일대에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사로 6촌박혁거세 집단을 중심으로 사로국을 건국하였다.

사로국은 뛰어난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 신라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박,석,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가 이사금으로 추대되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 하고 있었다.

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물왕때에 이르러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 내물왕은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 확립
  • 왕의 칭호도 대군장이라는 뜻의 마립간으로 고쳤다.
  • 또한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대부분 차지
  •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의 교류로 중국의 선진 문물 받아들임
  • 이 당시 왜가 침입해서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물리쳐준 적이 있었다.

가야의 성립과 발전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자,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 가야는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3세기부터 금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가야는 철을 다루는 기술이 좋았으며, 낙동강 하류의 해상 교통을 중심으로 낙랑군 왜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5세기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금관가야까지 공격을 받았으며 금관가야는 맹주로서 지위를 잃게 되었다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잡은 백제

삼국 간의 항쟁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장악한 나라는 백제이다. 4세기 중엽의 근초고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 마한의 남음 영토 정복
  • 남동쪽으로 가야의 세력권이던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력 행사
  •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을 공격해 고국원왕 전사, 황해도 일대 차지

침류왕때에는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왕실의 권위를 놏이고 백성의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공격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5세기에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성장한 고구려

4세기 말에 즉위한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 진출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광개토 대왕은

  • 서북쪽으로는 후연을 격파,
  • 동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굴복시켜 요동을 포함한 만주 남부 지방과 두만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
  •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지역 차지
  •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며 남부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힘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분열된 중국의 남조, 북조와 교류하면서 외교적 안정을 꾀하고,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장수왕은 국내성 기반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
  •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
    •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

--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다. 신라도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백제와 화친하는 등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경계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 때에 본격적인 제도 정비를 실시하였다.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신라 로 정하고 ,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으로 바꾸었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우경을 장려하고, 노동력을 위해서 순장을 금지했다. 지증왕은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도 정리하였는데 특히 지방 행정 구역을 주,군으로 나누어 관리를 파견하였다. 한편 지금의 울릉도 일대인 우산국을 비롯하여 경상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율령을 반포하고 관리들을 17등급으로 나누어 복색으로 서열을 구분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병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김해지역의 금관가야를 병합하였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떄에 이르러 크게 팽창했다. 진흥왕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또한

  •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아 한강 유역을 모두 장악
  • 고령의 대가야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 차지
  • 북쪽으로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 이를 자랑하기위해서

    신라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등의 비석


한편 나,제 연합군에게 한강을 상실한 고구려는 지배충의 분열로 국정이 혼란해졌다. 고구려에 우호적이던 북위가 멸망하면서 중국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유목 민족인 돌궐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대외적 위기에 직면

백제는 6세기 무령왕성왕의 노력으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 무령왕은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양과 교류해서 문물을 수용하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대외 진출의 여건이 좋은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바꾸었다. 또한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하고 지방 제도를 정비해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하였고 왜에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물을 전해 주었다. 성왕은 신라와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되찾지만 배신당해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았긴다. 이후 복수하려고 성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하지만 관산성에서 크게 패하고 전사한다.

가야의 발전과 쇠망

금관가야가 쇠퇴하자 고구려로 부터 피해가 없던존버하던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 한다. 대가야는 농업에 유리한 입지 조건과 풍부한 철 산지를 가지고 있었다.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햐 소백 산맥 서쪽까지 세력 범위를 넓힘. 신라에 침입한 고구려를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함.

그러나 가야는 연맹이 소국이 독림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하였기에 힘을 모을 수 없었다. 백제와 신라에 의해 압박을 받음. 이에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세력을 유지하려 하지만 532년 금관가야는 신라에 병합되고, 562년 대가야가 신라 진흥왕에 의해 병합되며 가야 연맹은 해체되었다.


신분제 사회의 성립

고대 사회에서는 여러 부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지배층 사이의 위계 서열이 마련되어 점차 신분 제도가 확립되었다.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농업에 종사하는 하호 그리고 주인에 예속되어 생활하는 천민이 있었다. 이는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왕족을 포함하는 귀족과 평민 그리고 천민의 신분 구조로 재편되었다.

  • 왕족을 비롯한 부족장 세력들은 중앙위 귀족 신분으로
  • 대부분의 농민들은 평민들로
  • 대부분의 노비들이 천민층이였다

삼국의 사회 모습

고구려는 산간 지역에 자리해 식량 생산이 힘들었다. 따라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형법 적용을 엄격히 하였다. 고구려의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지위를 세습하며 관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백성들은 대부분 자영 농민이였으나 생활이 불안정하여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고국천왕때는 진대법(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는 제도)을 실시하였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문화적 기품은 씩씩하였고, 형법이 엄하였다.

신라는 초기 부족 사회의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는 이러한 부족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국왕을 폐위시키거나 새로운 국왕을 추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혈연에 따라서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가 있었다. 신라에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한 화랑도조직이 있었다'.

삼국의 경제 정책과 경제 생활

삼국의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를 조세로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은 공물 형태로 수취하였다. 노동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농사철에는 부역을 금지하고 우경이 확대되었다.

삼국시대의 수공업과 상업 및 무력 활동은 주로 왕실과 지배층의 필요 물품을 조달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신라에서 5세기 말 금성(경주)에서 시장이 열렸고, 6세기에는 감독관청인 동신전이 설치 되었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과 사회 모습

6세기 말~7세기경 동북아시아의 전세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차지 하였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 및 왜와 교류를 강화하며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한편 고구려 역시 중국에게 압박을 받아 돌궐과 연합한다. 그리하여 6세기 말 이후 동북아시아에는 고구려, 백제, 왜, 돌궐로 이루어지는 남북 연합 세력신라와 수,댱동서 연합 세력이 대립하였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중국을 통일한 수는 주변으로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에 복속을 요구했다. 이에 고구려는 좆까라 하고 요서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성과 없이 돌아갔다.

뒤를 있는 수 양제는 직접 113만의아마 구라일 거임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나 실패함. 그리고 퇴각하는 군대를 살수 대첩으로 물리침. 이후 수나라는 무리한 전쟁과 토목 공사로 좆땠다.

수 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한다. 당 태종은 처음에는 고구려와 친선 관계였지만,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지역에 천리장성을 쌓고 군사력을 강화. 이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즉위하고 있었는데,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해서 이를 구실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645년 당 태종은 랴오허강 일대의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무너뜨린뒤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물리쳤고**(안시성 싸움)**. 결국 당은 신라와 편을 먹는다.

나-당 동맹의 체결

고구려가 수-당이랑 싸울때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해 도움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이 신라가 예전에 먹은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해서 결국 협상은 실패. 그래서 김춘추는 당으로 가서 나-당 동맹이 성사되었다.

백제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기벌포 전투에서 패하고, 계백의 결사대마서 황산벌에서 김유신에게 패함 결국 나-당 연합군은 사비를 함락하고 웅지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항복한다.

남은 것은 고구려 였는데, 연개소문이 살았을때는 잘 막았는데, 연개소문 죽고 개판됨 그래서 평양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하며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백제랑 고구려가 둘다 조때고 여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 백제의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 으로 추대하였고, 흑치상지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 고구려는 고연무가 오골성에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고 안승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투항해 보덕국을 세움

나-당 전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당은 백제 고구려 망하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백제의 옛땅에 웅진도독부를 신라의 금성에는 계림도독부를 두었다. 근데 신라가 이김.. 대동강 이남에서 당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 한계점
    • 외세인 당을 끌어들였다
    •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다
  • 의의
    • 고구려, 백제의 유민과 함께 당을 몰아내 자주적인 통일을 달성
    • 백제-고구려의 문화와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통합하여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과 왕권의 강화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후 그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했다

** 문무왕**은 통일을 마무리한 후 내부 반란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신문왕김흔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 세력 숙청 또한 왕권을 확립했다.

  • 중앙 정치 기구와 지방 행정 조직 마련
  • 군사 조직을 정비
  • 국학을 설립 (유학 교육)
  • 관리들에게 관료전 지급
  • 녹읍을 폐지

왕권이 강화되며 6두품 세력은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서 두각을 나타냄

통일 신라의 통치 조직 정비

신라의 중앙 통치 조직은 왕의 직속 기구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 장관인 시중은 왕명을 받들어 국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다 집사부 아래에는 13부를 두어 행정업무를 나누었으며,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어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 상수리 제도-- 지방 세력을 견제 (지방의 힘있는 자제를 수도로 오게 해서 반란 같은거를 못하게 함)
  • 외사정 파견

군사 조직은 9서당 10정을 설치 하였다

신라 말의 사회와 새로운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신라는 진골 귀족 간의 다툼으로 혼란해졌다.

  • 혜공왕 피살
  • 150 년간 왕이 20명
  • 김헌창
  • 장보고

그리하여 9세기말 진성여왕때 전국각지의 지방민의 봉기가 일어남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세력이 성장해서 일정지역에 독립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 도선의 풍수 지리설

후삼국의 성립

신라가 혼란하니까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세력을 모아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 견훤은 전라도 지역에서 후백제를 세웠고 신라왕족 출신 궁예 개성에 도읍을 두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하지만 호족을 탄압하고,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해 반발을 샀다. 그래서 호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송악의 호족인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발해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가 망하고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통제 했지만, 틈을 타 대조영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지린성의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웠다. 9세기 초 선왕때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다

발해의 통치 체제

중앙 정치 조직은 당의 3성 6부를 받아들였지만 운영 방식은 독자적이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다.

통일 신라의 사회

신라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민족 융합 정책을 추진했다.

  • 9개 주를 편성할때도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땅에 3개씩 주를 할애 하였다
  • 중앙군 9서당에는 신라인 & 말갈인 & 고구려인 & 백제인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귀족들에게 지급하는 식읍을 제한 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면서 녹읍을 폐지. 백성들에게는 정전을 지급하였다

  • 따라서 귀족들의 농민 지배력이 약화 되었다. 그리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촌락 문서를 작성하였다

통일 신라의 상업과 무역

당나라, 왜, 발해와 교역을 하였다 9세기 장보고의 청해진은 신라-당-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거점을 완성하였다 무역항으로는 울산항, 청해진, 영암, 당항성이 그게 번성하였다, 특히 울산항에는 이슬람 상인까지 들어와 무역하였다.

  • 신라방 신라촌, 신라소 신라관등이 만들어짐

발해의 사회 모습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으로 구성된다. 발해의 핵심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였으며 이들이 중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방 촌락은 토착 세력인 말갈인이 다스리게 하였다. 결론: 짬뽕 문화

발해의 경제 발달

9세기 발해는 경제적으로도 성장했다. 농업은 밭농사 중심 수공업 발달

발해는 당, 신라,거란, 일본등과 무역을 하였는데 활발했음 ㅇㅇ

고대 국가의 국제 교류와 문화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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